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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을 보다 - 공공미술은 위험한 씨알이어야 한다!
[141호] 2007년 05월 07일 (월) 김종길 미술평론가


공동체 예술은 20년 전 민중미술계 화두 중의 하나였다. 생활 속에서 예술가의 예술을 소통시킨다는 취지를 가진 이 예술론은 소박한 발상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민중미술을 가능케 하는 민중미학의 한 축으로서 ‘실천적 예술론’에 다름 아니었다. 환경미술과 환경조형, 공간디자인 등과 같은 새로운 담론과 습합해 공공미술 담론에 이른 지금의 상황은 그래서 초기 담론의 실체였던 ‘공동체 예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최근 공동체 예술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대추리 현장미술이다. 여기서 펼쳐진 공동체 예술의 특징은 예술가의 자발적 참여다. 공공기금 혹은 어떠한 공적 자본이 강제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추리 현장예술은 이뤄졌다. 매우 현실적인 사건일 터인데, 그것은 점진적이었고 확장적이었다. 또한, 대중가요를 비롯한 문학, 미술 등 전방위적 예술이 자발적 동원령에 경도된 기이한 문화현상이기도 했다. 시인들은 골목길 담에 시를 썼고, 화가는 벽화를 그리고 조각가는 희망 조형물을 세웠다.

가수는 비닐하우스에서 노래했다. 활동가는 밥을 짓고 살림을 꾸렸으며, 평론가는 ‘예술’보다 ‘현장’을 도마에 올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것이 80년대식 공동체적 신명론이니 민중미술론이니 하며 과거를 되새김하지 않았다. 왜? 이것은 예술운동이되 생명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죽임에 맞선 ‘살림’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땅의 살림이요, 민중의 살림이요, 생활의 살림이 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원형질적인 공동체 예술의 사례는 자연미술가 그룹 ‘야투Yatoo’가 시도했던 원골마을 프로젝트다. “藝卽農 農卽藝”라 표방한 이 자연미술 프로젝트는 예술이 독립된 미적 구현체가 아니라 ‘본래적 예술’로서 이미 삶 속에 내장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당대적 사건이기도 했다.

2006년, 필자는 10회째를 맞이한 원골 마을 전시를 둘러보았었다. 마을 주민들은 야투 회원과 자연미술비엔날레에 참여한 외국작가들을 초대해 작은 파티를 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입소문을 탄지 10년이라 매 년 이곳을 찾는 관광객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자연미술이 근원적인 생태환경론을 주장하며 ‘생명’을 주요 화두로 가지고 있다는 데서 이들의 활동이 ‘농자지천하지대본(農者之天下之大本)’으로서 ‘藝者之天下之大本’이요, ‘生者之天下之大本’이라는 예술이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생명예찬이요, 삶의 예찬이다. 반대로 말하면, 생명에 반하는 것들에 대한 ‘살림’운동인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 예술이라는 것은, 필자의 미학적 인식이 그 기저에서 작동한 것이겠지만, 저항과 실천이라는 행동주의 미학이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 예술의 예술가는 실천적 행동주의자다. 그의 역할은 공동체의 살림을 바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운동이 살림운동으로, 다시 생명운동으로 확장된다.
최근 공동체 예술은 ‘공공미술’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자리 이동한 듯하다.

공동체 예술이 한 시대의 예술론으로 남았고, 이 운동을 주도했던 작가들에 의해 개별적이고 산별화된 지역미술운동으로 스민 것을 반추할 때, 공공미술 현장의 확장세는 가히 새마을운동에 버금간다. 하지만, 되짚어 보건대 공공미술이 공동체 예술과 달리(지극히 공동체 예술론을 표방한다 할지라도) 체제내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한계다.

그 속성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문화관광부 산하 공공미술추진위원회가 향후 정식기구로 발족해 주도적 역할을 갖는데서 비롯될 수 있다. 공공미술이 공익(public interest)과 상관하는 것은 사실이나 미술을 통해 ‘공공영역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다양한 실천’이며, ‘장소·이슈·사건·의식의 디자인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되살린다’는 위험한 씨알구조를 인식해야만 한다.

즉, 민주주의는 위험한 상상력을 가진 시민들로 만들어진다는 얼 쇼리스의 말처럼 공공미술은 변화이며 실천이며 살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의 조건’에서 공공성을 강조했던 한나 아렌트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그녀는 근대 이후에 사적인 것만을 중시하여 공적인 것이 소멸하였고, 타인과의 관계가 부재한 사적인 삶만이 영위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사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공적인 삶, 자신만의 삶을 벗어나 공적인 문제에 함께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촉구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그녀가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제시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지평과 맞닿아 있다. 아렌트는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972년 11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당신은 어떤 입장인가?”라는 질문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사상적 독창성은 좌파나 우파, 진보나 보수주의 자유주의나 공동체주의 등 우리가 어떤 정치사상을 규정할 때 사용하는 범주 어디에도 그대로 일치하지 않는데서 확인된다. ‘공공’의 개념이 특정한 정치적 속성을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자칫 ‘정부미학’의 한계상황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술의 사회적 개입이라는 측면에서 공공미술이 가져 올 체제 저항적 순간을 그들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문제는 미술의 행위가 어떤 환경의 새로운 소통 내지는 미적환기를 위한 사회적 책무 따위가 아니라 ‘사회’라는 전체주의적 규율에 의해 그것이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이해되고, 정신을 억압해 온다면 어찌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공공의 환경은 생명을 둘러 싼 우주의 집과 같다. 살림의 제 순환구조에서 온전한 몸으로 환하게 살아갈 집. 그래서 집은 생태적 공간으로서 단순히 비어있는 방의 집결체가 아니라 생명을 키워가는 어미이자 그 자체로 숨결을 간직한 ‘온(溫)’ 생명이다. 그렇다면 공공미술은 이러한 ‘온 생명’의 숨결을 표현해야 할 터이다. 생태비평이 생명에 반하는 것들에 대한 저항담론이듯이 현장미술로서 공공미술은 또 다른 면에는 ‘공공’에 반하는 모든 억압적 기제들의 반대편에서 그것과 맞서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지 않을까. 공공미술의 ‘공공’개념에는 공동체 예술에서 언급했듯이 아직 이러한 저항적 사유가 존재한다.

노암 촘스키는 대중이 갖고 있는 중대한 환상 가운데 하나는 ‘정부’가 곧 권력 그 자체라는 생각이라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권력 그 자체가 아니며 권력의 한 부분만을 담당하고 있을 뿐 진정한 권력은 사회를 소유한 사람들의 손에 있는 것이라고 통박한다. 우리가 다시 공공미술의 체제 속성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종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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