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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일반대학원 총학생회의 연원
창설멤버 권승구 교수 인터뷰
[200호] 2017년 06월 12일 (월) 김세연 편집위원
   

   * 1985년 대학원 총학생회 창설 멤버이자, 현재 우리학교에 재직 중인 권승구 식품산업관리학과 교수를 만났다. 창설 멤버 중 1대 회장단이었던 이재필(사회학과), 양정모(수학교육과) 선배님과 2대 회장단 장시기(영어영문학과), 이성현(공과대) 선배님 중 몇 분은 유선상으로 안부를 전해주었다. 20여 년 전의 일이라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다고 너털웃음을 짓다가도, 가만 골똘히 기억을 더듬으며 선배님이자 선생님으로서 진지하게 전해주신 여러 이야기들을 지면에 담아보았다. 인터뷰는 임세화(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원우가 진행했다.

 

   대학원 총학생회를 만들다


   임세화(이하 임): 현재 대학원 총학생회가 없거나, 있어도 원활히 운영되는 학교가 많지 않은 실정입니다. 다행히 우리학교에는 2017년 기준 33대에 이르는 대학원 총학생회가 있고, 원총이 대학원생의 연구환경 개선과 복지 증진 등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요. 사실 대학원생들이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조직해서 만든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어떤 목표 내지 마음가짐으로 임하셨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1985년 대학원 총학생회를 창설하셨던 발기인 중 한 분으로서, 창설 계기와 배경, 회장단 구성 등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권승구(이하 권): 85년도 이전에도 대학원생은 있었지만, 대학원생을 대변하거나 복지를 해줄 기구가 없었어요. 우리가 그걸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거죠. 학내외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중 대학원에 진학한 사람들 위주로 시작하게 됐어요. 다들 서로 다른 단과대였는데, 그때는 대학원생 규모도 적고 그래서 서로 알음알음 교류할 기회도 지금보다 많았어요. 그러다 서로 의기투합을 한 겁니다. 사람들끼리 친하다보니 일을 진척하기 쉬웠어요. 서로 평소에도 생각이 맞으니까 만났던 거고요. 1대 회장이었던 이재필은 나중에 정치를 하다가 지금은 연락이 끊겼고, 부회장이었던 양정모는 중부대 교수로 있어요. 연구원이 된 친구도 있고 그렇죠. 저는 1대 총무부장이었습니다.


   임: 총무부장이면 전체 예산을 총괄하는 자리니까, 실세셨네요. (웃음)


   권: 예산은요 무슨. (웃음) 1학기 때는 크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학교와의 갈등 이런 게 주로 있었죠. 당시 학교와 대학원장은 ‘대학원에 그런 게 뭐가 필요하냐, 애들도 아니고 공부나 하면 되지’ 이런 입장이었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 대학원도 조직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죠. 처음에는 이름도 총학생회가 아니었어요. 대학원협의회였나, 그랬죠.
   그런데 당시 대학원 학감이었던 화학과 성용길 교수님이 몰래몰래 지원도 좀 해주고, 위로도 해주셨죠. 정말 고마웠어요. 교수님이 그런 지원과 응원을 해주셔서.
1학기 때에는 계속 본부와 대학원장을 찾아가 싸워서 결국 사인을 받아냈어요. 그리고 2학기 등록금을 걷을 때 대학원 교학과에 가서 한쪽에 책상을 놓고 오는 사람에게 일일이 사정 얘기를 하고 회비를 받았어요. 당시에는 등록금을 직접 수납했거든요. 사실 교학과에서 복도에 나가서 받으라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긴 했는데,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어요. 복도에 앉아 회비를 걷으면 누가 신뢰를 하겠어요. (웃음) 거의 500만원 가까운 회비가 걷혔어요.

 

   임: 500만원이면 당시로서는 정말 큰 금액 아닌가요? 대학원협의기구에 대한 학생들의 호응이 상당했던 거네요.


   권: 그렇죠. 회비도 회비인데, 우리는 첫째로 L101을 점거했어요. 약간 창고 같은 좁은 강의실이었는데 매일 비어 있길래 배째라 하고 밀고 들어간 거죠. (웃음) 학교에서도 그걸 뭐라고 하지 못했고요. 학교가 학생조직의 활동에 대해 지금처럼 관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요.
걷은 회비로 책상이랑 테이블, 집기류 같은 걸 사서 들여놓았어요. 그 다음에는 대학원수첩을 제작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줬어요. 나름 활동비도 있었는데 회장 3만원, 부회장 1만 5천원, 총무 1만원이었죠. 근데 이게 아주 재밌었어요. 모두 보는 데서 나눠줬다가 바로 다시 걷어서 그 돈으로 회식도 하고 활동비로 사용했죠. 한 마디로 줬다 뺏은 건데. (웃음) 당시에는 우리 각자도 돈이 넉넉지 않았고, 학교에서 등록금 혜택을 줬던 것도 아니니까요. 자원봉사 한 거죠. 그래도 아낀 회비를 모아서 2대에 이월금도 줬어요. 그 당시 학생운동도 활발했고 싸우자는 분위기가 팽배했었으니까요. 어제의 용사들이 뭉친 거죠.

 

   조교협의회, 총파업 결의


   임: 80년대는 학생운동이 한창 격렬했던 때잖아요. 정치사회문제 외에도, 학생들이 뭉쳐서 학교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그랬었나요?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많으실 것 같아요.


   권: 다른 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조교협의회가 있었어요. 임금협상까지는 아니지만, 조교 권익 같은 것들을 보호하는 기구였어요. 89년에 장시기 선생이 조교협의회장이었는데, 당시 처음으로 무려 ‘하드’가 있는 컴퓨터가 학교에 들어왔어요. 지금 들으면 다들 웃겠지만, 이거 혹시 폭발하지는 않을까……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웃음)
   그때 조교들이 컴퓨터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 전에는 하드가 없고, 디스켓 넣어서 쓰는 멍텅구리 컴퓨터라……. 그런데 조교들한테 그 컴퓨터로 성적을 입력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겁니다. 아무도 모르는 건데 갖다놓고 입력하라 하니까 조교들 다 못하겠다 나자빠지는 거죠. 한두 건도 아닌 성적을 입력하다 잘못되면 조교가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그래서 대략 53개 학과 조교들이 강의실에 다 모여 회의를 했죠. 지금도 기억나는 게 50명 넘게 들어오니까 강의실이 꽉 찼어요. 우리는 그걸 끝까지 거부했고, 내 기억으로는 당시 부총장님이 공대 교수였는데 결국 공대 대학원생들 동원해서 성적을 입력했어요. 학교 쪽에서도 무리한 일을 시킨 거니, 징계는 없었고, 그냥 넘어갔어요, 부총장님 과의 학생들만 죽어났죠. 학과 교수님들도 내가 우리 조교 일 안 시키는 건데 왜, 이런 분위기도 있었고, 87년 이후 동국대가 뒤집어졌던 직후라서 학생들을 못 건드는 분위기도 있었어요.
   6개월이 지나고 그때 총파업(?)을 주동했던 사람들 중심으로, 방학 때 처음으로 한글 도스 교육이 있었어요. 우리도 돈 내고 수업을 들었죠. 그 전에는 컴퓨터 잘못 만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공짜로 가르쳐준다고 해도 거부했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앞으로 컴퓨터 못 다루면 큰일 나겠다고 생각이 드는 거예요.

 

   “대학은 우리사회에서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곳”


   임: 시대가 격변했다는 게 여러 지점에서 느껴지네요. 90년대 중반 이후에 학생운동이 약화되면서, 학생사회와 총학생회의 역할과 위상도 변동되고 있는 것 같아요. 조교 문제만 해도, 총파업과 같은 단결은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죠. 학생과 교수들의 여러 활동과 요구에도 불구하고, 학내 소통의 구조와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는 더 폐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최근 2-3년간 지속되고 있는 학내 갈등에 대해 전직(?) 총학생회 간부로서, 그리고 교수의 입장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해야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요?


   권: 제가 학교를 다닐 때는 ‘정치투쟁’이 흔한 시기였죠. 심심치 않게 휴교령이 있던 때니까요. 그땐 입학하면 새내기들의 손에 선배들이 짱돌을 쥐어줬어요. 학교 안에는 군인들이 돌아다녔고요. 지금 후문 앞에 칼과 총을 든 키 큰 군인 대열이 서 있는데, 제가 신입생일 때인데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시절하고 지금은 같지 않다고 봅니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하고,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해결책이 없고, 2-3년에 걸쳐서 이런 일이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는 게 가장 심각한 문제겠죠. 대학은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그런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메아리 없이 벽에 대고 얘기하는 것처럼 되어서는 어렵겠죠. 학교 당국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전향적이고 허심탄회한 대회의 장을 열고,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대학은 우리사회에서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곳이니까요.
   무조건 징계를 하고 배제하고 싸우는 게 최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학교가 학생들에 대한 가혹한 징계부터 풀어주고 선도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해결점을 찾을 수 있겠죠. 구성원들과 허심탄회하게 소통을 하려는 자세를 보이면, 학생들도 투쟁이 아니라 대화에 응하는 주체로 서게 될 것입니다.

 

   조교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학과 사무실에 오지 않으셨던 교수님


   임: 대학원 재학 시절, 학생회 활동도 하시고, 조교로 일도 하셨으면 많이 바쁘셨을 것 같아요. 당시 어떻게 일과 공부를 병행하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지금의 후배들, 조교로 일하는 제자들을 보실 때 어떤 마음이신지도 궁금하고요.


   권: 저는 조교 기간과 시간강사로 일했던 기간이 겹치는데, 대강 계산해도 교수님 연구실에 거의 10년 가까이 있었어요. 3년 정도는 사무조교로 일하며 장학금을 받았던 걸로 기억하고요. 연구실 구석에 앉아서 공부도 하고 심부름도 하고 교정도 보고 그랬죠. 그 시절에는 그게 당연했어요.
   사실은 가능한 조교를 안 하는 게 좋아요. 제가 사무조교를 몇 년 하면서 겪은 직업병이 뭔지 아세요? 집에 가면 사지 뻗고 누워요. 만사가 귀찮아서. (웃음) 학과일도 하고 이런저런 심부름도 하고 나면 엉덩이 붙일 시간도 없고……  지금은 사무조교와 연구실 조교가 있지 않나요. 그때는 사무조교밖에 없었어요. 그때는 우리 과에 교수님이 5명 있었는데, 사무도 보고 교수 5명을 다 커버했었죠.
제 교육조교한테는 가능한 일을 안 부탁해요. 그런데 행정조교를 하라고 말하기는 껄끄럽고 조심스럽죠. 앞으로의 방향은 학과 행정을 전문 사무직원으로 채용해서 맡기는 수순으로 가야한다고 봐요. 그런 식으로 사무는 전문직원이 하고 학생들은 공부에 집중하게 장학금을 주고. 그게 맞아요. 조교 해본 사람으로서 사무조교는 권할만한 게 아니에요. 너무 힘들어요.
   물론 학교마다 다르기는 했던 것 같아요. 서울대에서 우리학교로 초빙 강의하러 오셨던 김문식 교수님이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그 분이 3시에 수업을 하러 오시면, 계실 곳이 마땅치 않으니까 2시 50분쯤까지 사무실에 잠깐 계셨다 가시곤 했었는데요. 제가 커피도 드리고 했었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사무실에 아예 안 오시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차 안에서 있다가 3시에 바로 강의실로 올라가시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서울대는 사무조교와 교육조교가 따로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학교에 와서 보니까 제가 수업 전에 사무조교와 교육조교 일을 병행하느라 정신없고 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방해 된다고 일부러 안 오셨다는 거예요. 공부하라고…… 그 말씀 듣고는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학생은 교수를 우려먹어야 해요”


   권: 요즘 갑질, 갑질 하잖아요. 교수의 갑질은 없어져야 하지만, 교수와 학생이 같이 부대끼면서 서로 배워나가는 과정도 있다고 생각해요. 대학원생은 행정적인 건 안 배워도 돼요. 그런데 같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공부를 하고, 때로는 같이 술 먹기도 하고 이러면서 얻는 긍정적인 효과들도 분명 있어요. 어느 교수처럼 팔만대장경 복사시키고 그런 건 당연히 안 되지만요. 교수와 학생이 자발적으로 릴레이션십이 되면 좋은데, 그 경계가 애매하죠. 그래도 학생은 교수를 우려먹어야 해요.
   우리 교수님은 절대 저한테 술 먹자 이런 말씀 안 했어요. 창밖을 보면서 “야, 하늘에 주기(酒氣)가 끼었네” 말씀하시면, 같이 학교 근처 술집에 가서 소주 각 3병씩 까고, 둘 다 취하는 거예요. 선생이고 학생이고 없이, 그러면 막 들이미는 거죠. (웃음) 평소에 궁금한 게 있으니까, 물어보기 조심스러운 것들, 막 물어보는 거죠. 요즘 애들은 사회과학대 수업인데도 토론을 잘 안 해요. 속으로 이럴 바엔 소주 한 병씩 먹고 하는 게 낫지 않나 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나는 학교에서 찍히겠죠. (웃음)


   임: 술 한 잔 나누며 허물없이 토론할 수 있는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라니, 상상만 해도 따뜻하고 힘이 되는 추억인 것 같아요.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 진학하기 전에 대학원생들이 많이 고민을 하곤 하잖아요. 선생님께서는 그런 고민은 없으셨나요.


   권: 그 당시 전일제 대학원생이 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입학할 때부터 쭉 쫄병이었죠. 석사 졸업을 하고 한 학기 동안 방황하면서, 박사과정을 들어올까 말까 고민했어요. 까딱 잘못하면 고등 룸펜 실업자니까요. 내가 집에 장남인데 결혼도 해야 하고. 고민을 굉장히 많이 하다가, 이건 결론이 날만한 문제가 아니에요.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까짓것 어떻게 되겠지. 인생 어차피 조진 거……(웃음)
   시간강사도 10년을 했어요. 시간강사 못할 짓이에요. 계약서가 있나 뭐가 있나 학기말에 학과장이 불러서 강의를 배정해주는 시스템이니까요. 그래도 그때 우리는 전임강사만큼 받았어요. 여기저기 다녀서 문제였지. 삼척이 제일 멀었고, 일주일에 41시간까지 해봤어요. 저만 그런 것도 아니고 고생하셨던 다른 분들도 다 보실 텐데, 이런 거 쓰지 마요. (웃음) 강의도 하고, 조교할 사람 없으니 조교도 하고…… 고속버스를 다섯 시간 타고 오니까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700자 원고지에 박사논문을 적고 수정하고 그랬어요. 나중에 교수되고 나서 좀 억울했던 게 시간강사를 여튼 10년을 했는데, 공무원 1년 한 사람보다. 호봉 인정해주는 기간이 더 적더라고요. 교육노동자로서 열심히 근무했는데. 씁쓸했죠.

 

   가슴 속으로 흘렸던 눈물을, 미안함을……


   임: 대학원 재학 시절 했던 활동 중에 어떤 것들이 가장 기억에 남으시나요?


   권: 원총을 만든 것도 기억에 남고요. 대학원 학생회가 안정되면서부터 잘한 게 여러 가지 있던 것 같아요. 그 중에서도 가장 잘한 것 중 하나가 1988년부터 대학원신문을 현재까지 꾸준히 발간해 오고 있다는 거고요. 안타까운 건 요즘은 대학원생도 인쇄매체를 잘 안 읽는다는 거죠. 전일제학생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고요. 예전에는 대학원신문을 통해서 이의 제기와 비판이 활발했어요. 다른 학교 대학원신문과 서로 지면을 통해 논쟁하기도 했죠. 지금은 이런 게 많이 약화된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생들의 생각과 연구결과를 소개하고 알리고, 다른 대학의 전문가들 얘기도 싣고, 대학원신문의 역할을 놓지 않고 기능하는 것이 가장 잘한 게 아닌가 싶어요. 연구주제가 점차 다변화되고 있는데, 대학원생 공통의 의제나 공유와 교류의 장을 만드는 역할을 더 강화해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우리도 90년대쯤 ‘인문사회과학 연구회’라는 학술조직을 만들었던 적이 있는데요. 지금도 인터넷 카페에 자료가 있어요. 인문계 사회계 대학원생 모여서 만든 일종의 연구공동체죠. 일본어 학습분과, 한국경제분과, 정치경제학분과 등등을 만들어서 함께 공부했어요. 각 분과별로 지도교수님도 있었고요. 돌아보면 그런 연구공동체가 참 의미 있었고 좋았어요. 덕분에 공부도 많이 했고요.
  

  임: 고단한 시절을 앞서 건너오신 선배님으로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들이 있으실 것 같아요.
 

  권 : 사실은 자신 없어요.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고 싶지만…… 그런데 이 과정이 너무 힘든 과정이라서요. 사실은 우리 때보다 훨씬 더 힘들죠. 대학 구조와 학문적 조건들이 너무 변화했으니까요. 대학원생들의 역량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이 잘 마련되어 있지 않고…… 학문적 동료로서 함께 하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네요. 89년 2월에 석사논문 학위를 받은 직후 했던 오만 생각, 고민들이 떠올라요. 어쩌면 그때 저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내 인생에 무책임한 결론을 내린 걸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연구하고 치고받는 동료 제자들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학생들이 많이 팰수록 교수 실력은 늘어납니다. 그렇지만 자신 없어서 그 얘기 못하겠네요. (웃음)
   학교와 싸우는 일도, 저희 때의 운동권 학생회는 사실 학교와 싸울 일이 많지는 않았어요. 88년의 학자투가 기억나요. 우리학교 학생들이 데모를 주도했죠. 선봉에 서서 데모하는 애들은 20-30명이었는데, 그 애들의 바로 뒤에 서서 구경하고 있는 애들은 2천명이었어요. 사실 감옥 가는 게 두려웠던 마음들도 있었겠죠. 당시엔 무조건 징역을 살았으니까요. 저는 그때 구경하던 애들이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동참하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미안함과 분함을 아직도 가슴에 품고 사는 거죠. 그 사람들이 지금 촛불도 들고, 시민단체도 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때 자기들이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후배들도, 제자들도, 그런 마음들을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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