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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게 하는 책들
내 인생의 책
[199호] 2017년 04월 10일 (월) 백수린 소설가
   
     

    나와 동생이 어느 정도 커서 각자의 방을 요구하게 되기 전까지 우리 집에는 아버지의 서재가 있었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그 방을 자주 들락거렸는데, 아버지의 책을 읽기 위해서는 물론 아니었고 책장을 기어오르기 위해서였다. 한 쪽 벽을 모두 가리는 원목 책장은 그 당시 어디든지 기어오르는데 재미를 붙인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놀이기구였다. 기껏해야 너, 댓살 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겁 없이 책장의 칸칸을 딛고 높이, 높이 올랐다. 그런 나를 발견한 아버지가 깜짝 놀라 나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을 때까지.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가 방을 나가시기만을 호시탐탐 노렸다.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조차 느끼지 않고 나는 기를 쓰고 책장을 타고 올랐다. 집요하고 끈질기게, 전력을 다해서. 오로지 천장을 만져보고 싶다는 일념만으로. 생각해보면 그토록 무모할 정도로 전심을 다해 무엇인가를 향해 달려든 적은 그 후로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없었던 것 같다. 패배감이랄까, 생에 대한 체념 같은 것이 나라는 존재의 기저에 마를 듯 끝내 마르지 않고 고여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은 것은 대체 언제쯤이었을까. 무엇인가를 저지르고, 가뿐히 뛰어넘고, 중력을 모르는 존재처럼 날아오르고 싶은 나의 마음과 달리 나의 육체는 언제나 이만큼이나 뒤쳐져 느리게 걷는다. 가끔씩 나의 마음과 육체의 거리가 유난히 아득하게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저만치 날아가 버린 마음을 따라잡지 못한 내가 어둠 속에 버려진 동전처럼 초라하고 시시하게 느껴지는 날들. 그런 날에는 불투명한 안개처럼 감싸는 허무를 이겨내게 해줄 책들을 펼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은 그럴 때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책 중 하나다. 『연인』을 펼치면 이 소설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느낀 충격과 먹먹함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생사 원피스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남성용 중절모를 쓰고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채 난간에 홀로 기대 서 있는 프랑스인 소녀. “나는 그에게 그 슬픔이 꼭 낮 동안의 정사 때문만이 아니라고, 그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해준다. 나는 지금 줄곧 기다려왔고 또한 오직 나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그런 슬픔 속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나는 항상 얼마나 슬펐던가. 내가 아주 꼬마였을 때 찍은 사진에서도 나는 그런 슬픔을 알아볼 수 있다.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도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구절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 새 내 안에도 슬픔이 차곡차곡 차오른다. 이 소설은 갑부인 중국 연인과 어린 소녀의 열정적이고 허무한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소녀가 가난과 폭력, 그리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녀를 억압하는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스스로 욕망의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일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욕망에 관한 책이라면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나를 매혹하는 것은 물론 지드의 강렬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체다. 『지상의 양식』은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돌아와 자신을 억압했던 청교도 윤리부터 자유로워진 지드가 쓴 책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는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온 사람만이 가질 수 없는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한 문장들로 가득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내가 맨발로 딛고 있는 바닥의 감촉, 책 위로 어른거리는 그림자의 무늬, 언제부턴가 들려오는 빗소리 같은 것들이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방식으로 또렷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살아있음이란 이렇듯 타인의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에 온전히 집중하는 일.

   
 

   내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처음 읽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삶의 의미를 만드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소설이다. 최근에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제목으로 같은 소설이 다시 번역되어 출간되기도 했지만 내가 읽은 것은 1979년도에 출간된 아주 낡은 책이었다. 빛도 바래고 표기법마저 낯선 글자들로 가득했던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인내심이 필요했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덮을 무렵에는 광활한 우주에 홀로 내던져져 울고 있는 아이의 마음이 되어버려 있었고,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나자 나는 이 책을 좋아하게 됐다. 불멸의 저주에 걸린 사내 포스카가 등장하는 이 소설을 나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 앞에서 내 자신의 선택이 무력하게 느껴질 때 다시 뒤적인다. 과연 세상은 점점 더 나은 곳이 되어가고 있는가, 내가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기 위해 이토록 애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 나는 자주 포스카의 고독하고 권태로운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떠올리다보면 나를 보잘 것 없이 납작하게 짓누르는 영원이나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내가 살아있는 이 순간에 집중하자는 생각이 마침내 내게도 깃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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