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7.4.11 화 16:31
인기검색어 : 논문표절, 조교 문제, 등록금 인상
신문사소개 | 기사제보 | 광고안내 | 호수별 기사보기
> 뉴스 > 학술 서평 > 학술기획
     
시민들의 마키아벨리주의
[199호] 2017년 04월 10일 (월) 홍 철 기 정치학자

 

   
     △ Giorgio Vasari, <Leo X Parading through Florence>, 약 1558~1562.
     

 

 1513년에 완성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피렌체 공화정의 적이었던 메디치가에게 자신을 채용해달라고 설득하기 위해서 쓴 글이다. 그는 공화정의 외교관으로 활약하였고, 공화정 몰락 후에는 메디치 정권으로부터 고문을 받았다. 그런 그가 왜 이 책을 썼을까? 그의 저술 의도는 언제나 이 책의 독자들에게 혼란과 확신을 동시에 심어주었다. 교황청은 1559년에 이 책을 금서목록에 올렸다. 사후에 그의 이름은 ‘참주의 스승’과 동의어가 되었다. 반면에 혁명가들에게 마키아벨리는 정체를 숨긴 공화주의자로 읽혔다. 물론 이런 해석이 가능했던 이유는 올해로 저술 500주년을 맞는 공화주의 정치사상서 『로마사론』덕분이다. 그 이후 혁명과 민족의 시대독자들에게 마키아벨리는 외세에 맞서 내부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된 국민국가 건설을 역설했던 사상가가 되었다. 제국주의의 시대가 오자 이제 그는 국가이익에 대한 냉철한 계산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근대 정치학을 근대 과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정치의 과학자가 되었다. 비로소 그는 국가 이성과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전체주의와 파시즘의 시대가 지나자 이번에는 전체주의의 스승으로 내몰렸다. 가장 최근에 그는 중세를 벗어나던 시기의 세속적 공화주의자이자 현실주의적 인문주의자로 다시 태어났다. 기존의 수많은 자의적 해석들을 반박하면서 역사학자들이 사료를 들어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모습을 뒷받침하는 동안 몇몇 이론가들은 정치적 자유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정치 철학자로 그의 사상을 재해석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언제나 왜곡된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마르크스 자신을 구출해 내려고 하듯이 우리는 진짜 마키아벨리를 마키아벨리주의의 왜상으로부터 구출해내야 할까? 마키아벨리에게 씌워진 가면들이 가리고 있는 그의 진정한 얼굴을 드러내야 할까? 하지만 마키아벨리 자신은 군주에게 도덕적 외양을 유지하라고, 인민의 눈에 도덕적 군주로 비춰지도록 노력하라고 조언하지 않았던가? 그는 정치와 권력이 최종적으로는 타인들, 특히 다수의 눈에 비춰지는 모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결과론적 정당성을 옹호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마키아벨리 사상의 진정한 모습과 마키아벨리주의라는 다양한 오해의 간극은 어찌 본다면 정치적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은 아닐까? 20세기 독일의 가장 논쟁적 정치철학자는 정치적 인간의 딜레마를 정확하게 이해한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마키아벨리가『군주론』의 저자라는 사실과 마키아벨리가 마키아벨리주의자라는 해석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한다고 그는 말한다. 마키아벨리 자신이 정말로 마키아벨리주의자였다면, 그래서 그가 자신의 조언을 스스로 실천한 사람이었다면, 그는 결코 『군주론』의 저자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감동적인 문장’으로 가득 찬 어떤 책의 저자로 독자들에게 기억되었으리라. 군주는 말과 글 이외에도 다른 정치적 수단을 동원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군주는 심지어 그러한 수단을 동원하여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통제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군주에게 조언하는 정치철학자는 그러한 수단에 접근할 수 없다. 마키아벨리의 이 딜레마를 지적한 철학자는 나치에 부역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유에서 정치적 인간의 숙명과 같은 어떤 것을 보게 된다. 이 숙명을 쉽게 부정하거나 반박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정치가 그런 운명에 직면하게 되는 광경을 생각보다 자주 목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권력을 갖지 못한 일반 시민들의 정치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다른 종류의 마키아벨리주의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여기서 사례로 들려는 광경이 주는 인상과 마키아벨리주의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너무나 상반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이 두 가지 말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라고 단정 할지도 모르겠다. ‘시민들의 마키아벨리주의’라니?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모순된 표현이 비교적 잘 들어 맞는 광경들을 보게 된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싸움에서부터 미래라이프 대학 설치에 반대한 이화대학의 학생들, 그리고 민주공화국의 최고 권력자를 합법적 방식으로 물러나게 만든 광장의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당연히 그들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기존의 투쟁과 운동의 관점에서 이들은 분명 낯선 방식의 싸움을 하였다. 그들은 흔히 (그러나 부당하게도) 불순한 ‘외부세력’으로 지목되는 사회운동 단체들과의 즉각적인 연대를 거부하거나, 폭력적 방식 대신에 합법적 방식을 고집하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쓰레기를 줍고 청소를 하면서 집회의 도덕적 외양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규칙에 순응하려는 강박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고, 반대로 운동권의 ‘낡은’ 투쟁 방식을 극복한 도덕적 우월성의 증거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사실 정치는 최종적으로는 퍼포먼스이지 않을까? 특히 권력자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에게 허용되는 유일한 정치는 바로 공적 퍼포먼스이지 않을까? 이 퍼포먼스의 관객은 동료시민들이다. 동료시민들이 언제나 응원하는 우호적 관객일 것이라 넘겨짚지 말자. 그들은 욕설과 야유를 퍼붓고 심지어 ‘폭식투쟁’처럼 악의에 찬 역-퍼포먼스를 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다. 게다가 퍼포먼스라는 말이 주는 ‘연출된 일회성’의 인상과 반대로 매우 길고 지루하며 힘든 퍼포먼스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래왔다.

  『군주론』의 저자가 조언하듯이 이것은 퍼포먼스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측하지 못한 어떤 것을 보여주는 과감성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이 저자는 폭력에 대해서 말할 때, 또한 기적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한 번의 과감한 행동과 연출이 원하는 결과를 즉각적으로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의 퍼포먼스는 다른 퍼포먼스로 이어져야 한다. 결단력과 확신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원하는 바가 온전하게 관철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이 퍼포먼스가 무의미하게 중단되는 일을 원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우리 평범한 시민들이 한때 참주정의 스승이자 권모술수의 대가로 악명을 떨쳤던 피렌체 공화국의 인본주의자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 동국대학원신문(http://www.dgugspres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페이스북 방문해 주세요!
더 많은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육방송국 동국대학원신문 동대신문 동국포스트
동국대홈동국미디어컨텐츠 센터동대신문교육방송국동국포스트개인정보처리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4620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 1길 30 동국대학교 학술관 3층 대학원신문 | 전화 : 02-2260-8762 | 팩스 : 02-2260-8762
발행인 : 한태식 | 편집인 : 이철한 | 편집장 : 이한나 | 발행처 : 동국대학교 대학미디어센터 | 청소년보호책임자 : 문서영
Copyright DGUGSPRES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gupress@dongguk.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