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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서평] 폭력 너머, 혹은 폐허 이후
정이현,『상냥한 폭력의 시대』, 문학과 지성사, 2016.
[198호] 2016년 11월 21일 (월) 이만영 문학평론가
   
 
     
 

 통상적인 정치철학적 독법에 의거해 볼 때, ‘폭력’이라는 단어에서 역동(dynamic)의 감각을 읽어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가령 폭력이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 누군가는 ‘무력(force)/폭력(violence)’을 운운했던 소렐(G. Sorel)을, 또 누군가는 ‘주관적 폭력(subjective violence)/객관적 폭력(objective violence)’을 운운했던 지젝(S. Žižek) 등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법은 정이현의 소설을 읽는 데 그리 많은 참조점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무슨 얘기인가? 정이현은 국가나 자본을 폭력의 주체로 호명하는 상투적인 문법을 넘어서, 나 혹은 타자가 가하는 일상적인 폭력에 관심을 둔다. 소설에 드러난 폭력은 누군가를 살해하거나 통제하고, 때로는 누군가의 고통에 침묵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요컨대 『상냥한 폭력의 시대』에서 폭력은 도처에 널려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이 가하는 폭력은 일상적인 삶의 리듬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처세 전략이다. 고등학생 딸이 낳은 미숙아를 죽도록 내버려두는 ‘지원’(「아무 것도 아닌 것」), “한국인도 일본인도 많지 않은 곳”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열두 살 딸을 ‘관리’하는 ‘엄마’(「영영, 여름」), 타인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치부하고 자신의 삶의 유지에만 골몰하는 ‘경’(「안나」)과 같은 형상이 반복적으로 주조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자신과 딸의 삶을 가까스로 지탱하기 위해 미숙아의 삶을 언제든 내팽개쳐버릴 수 있고, 자신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딸에게 보이지 않는 폭력과 억압을 가하며, 타인보다 우위에 있다는 낭만적 환상을 고수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에 귀를 막아버려야 한다는 이 불온한 모럴. 이렇듯 정이현 소설에서는 일상을 견뎌내기 위해 (비)가시적인 폭력을 자행하는 인물들이 범람한다.

 따라서 정이현의 소설에서는 타자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을 발현하려는 인물도, 지독히 반복되는 삶의 권태 속에서 이를 갱신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인물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이번 작품집을 읽은 독자라면, 체념과 무기력이라는 건조한 정념만을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사회에 대한 분노의 정념들이 모조리 휘발되어 버린 불모의 상태, 윤리와 정치에 무관심한 채 그저 이 사악한 세계를 감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태, 그것이 바로 정이현이 바라본 ‘현대’의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고 천천히 소멸해갈 것이다.”(「미스조와 거북이와 나」)라든지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아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우리 안의 천사」)와 같은 체념적 진술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이다.

 이 냉랭한 전언들을 경유하면서 떠올랐던 나의 질문을 정리하자면, 대략 이러하다.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취향대로 살아가며, 권태로운 일상을 견뎌나가는 데 급급한 ‘우리’의 삶. 이 저주받은 삶에서 우리는 더 나은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타자의 고통이나 불안을 껴안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망각하고, 타자를 향해 ‘상냥한 폭력’을 자행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삶을 통해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물론 정이현의 소설 면면을 읽어보면, 이러한 질문에 대해 궁색한 답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이현이 나름의 문학적 기투를 통해 성취하고자 했던 미학은 그리 단순치만은 않다.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우리의 민낯을 대면하게끔 하는 것, 그리하여 우리를 성찰의 지점으로까지 이끌고 가려는 것, 마침내 폐허의 자리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게끔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이현이 고수하고 있는 하나의 미학적 포즈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길이 끊긴 것 같나요? 천만에요. 희망은 그 폐허의 자리에 깃들어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말이에요.”(「밤의 대관람차」)라는 진술은, 어쩌면 사막 같은 이 세계를 감내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작가가 던지는 고요한 속삭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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