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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 내 인생 바깥의 책
내 인생의 책
[198호] 2016년 11월 21일 (월) 정지돈 소설가
   
 
 

 어머니는 나를 뱄을 때 책을 읽지 않았다. 그녀는 영천의 돼지 농장에서 셰퍼드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집에 거의 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농장을 거닐며 아이가 제발 아버지 같은 인간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대청마루에 앉아서는 흙먼지가 날리는 마당을 보며 올드팝을 들었다. 그녀가 들었던 노래는 달리다의 <Paroles Paroles>나 앤디 윌리엄스의 노래를 들었고 나는 초등학교 때 그 노래들을 들었다. 어머니는 노래들에 대해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았고 점점 듣지 않게 된다고만 하셨다. 그녀는 일을 했다. 아버지는 음악을 듣는 일이 없었고 영화를 보거나 TV를 봤고 때때로 영화나 권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퇴근한 어머니가 저녁과 집안 청소를 하고 피곤에 지쳐 누으면 나도 그 옆에 따라 누웠고 아버지는 김기수나 홍수환, 장 폴 벨몽도와 커크 더글라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대개의 경우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이야기를 할 때만은 예외였고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와 권투 경기를 봤다.

 집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고 나는 다섯 살때부터 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무슨 책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방문판매사원이 떠넘긴 국내외 전래동화 시리즈였을 것이다. 부모님은 한번도 책을 읽어주지 않았고 나는 거실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책을 읽었다. 지금 기억에 남아있는 건 『푸른 수염』이지만 세부 내용이 그 뒤 나이가 들어 본 것으로 형성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내가 가장 즐겨봤던 책은 초등학교 초년생 때 큰아버지 집에서 발견한 세계의 불가사의에 대한 컬러 백과사전으로 어느 출판사에서 나온 어떤 종류의 책인지는 모르겠다. 아동용 책은 아니었고 어른들은 거기에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것 같다. 그 책엔 세계 7대 불가사의 뿐만 아니라 사스콰치나 네스 호의 괴수, 차가 거꾸로 올라가는 런던의 언덕, 버뮤다 삼각지대 등 온갖 초자연적이고 환상적인 불가사의들이 컬러 사진과 함께 정리되어 있었고 나는 책장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아무 페이지나 마구 펼쳐 읽었다. 어른들은 무슨 책인지도 모르고 책을 읽는 기특한 아이라고 나를 칭찬했고 나는 어른이 되면 고고학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대쉴 해밋의 책을 봤고 샘 스페이드에게 반해 탐정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망상은 중학교에 입학하며 산산이 깨졌다. 머리를 빡빡 깎이고 귀싸대기를 때리는 선생들 아래에서는 현실도피 양상도 초라하고 단순해졌고 나는 무협지나 판타지 외의 책을 거의 읽지 않았는데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는 대부분의 소설이 재밌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는 장르가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소설은 현실을 살아본 사람에게 스며들지 않고 현실을 생각하거나 꿈꾸는 사람들에게 스며든다. 나이가 들수록 소설을 읽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고다르도 존 케이지도 서른 이후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았다. 픽션은 착각에 바탕을 두고 착각과 착각의 열망을 먹고 산다. 나는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어제』를 아주 여러번 읽었다. 『어제』의 경우는 통째로 필사하기도 했으며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 대한 글을 써서 출판사인 열린책들에서 독자에게 주는 상을 받기도 했다. 상품은 6단 짜리 원목 책장과 미스터 노우 시리즈에 속한 50권의 세계문학이었는데 좋은 작품이 많았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없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좋아했던 작품이 많을 것이지만 내가 좋아하지 않았던 작품도 내가 그 작품을 읽었다면 내게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이를테면 알랭 로브그리예나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딱히 좋아하지 않았지만 영향을 받았고 그렇다면 그건 내 인생의 책일까 내 인생 바깥의 책일까.

 나는 20대 초중반에 한국의 여러 단편문학상 수상집, 이상문학상이나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수상집 따위를 읽으며 이렇게는 절대 쓰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자주했고 그때 그 수상집들을 보면서 했던 생각만큼 내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준 책이 따로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한때는 수십편이 넘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을 필사했지만 어느 순간 카버의 소설은 너무 지겹고 단순하고 가끔은 폭력적이고 위선적이다라고까지 생각하게 됐는데, 그렇다면 내게 카버의 소설은 어떤 영향을 준 것일까.
지금까지 내가 가장 많이 반복해서 본 책은 고다르의 인터뷰집인 『고다르X고다르』로 이 책은 소설이 아니지만, 내가 그 책처럼 글을 쓴다면 그것은 내게 소설이 될 것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더 이상 현실을 반영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현실은 한번도 거기에 있어 본 적이 없고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에 대해선 다른 사람들이 말하게 두자. 나는 그런 재능을 원한 적이 없고 아버지는 늘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결혼 이후 생의 대부분 순간에서 불행을 느꼈다. 그러니까 현실에 대해선 그만 이야기하자. 이게 현실이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내가 사랑하는 책의 모든 조각난 이야기 속에서 나와 나를 벗어난 말들을 본다. 그것은 좋은 책이 아니고 나쁜 책도 아니다. 좋고 나쁜 것, 훌륭하고 엉터리 같은 것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지만 나는 그런 건 이제 그만해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 백남준은 1976년에 쓴 에세이 「인풋 타임과 아웃풋 타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번 도쿄를 방문했을 때 동서양 철학가들이 시간에 관해 저술한 10여권의 책을 구입했다. 뉴욕에 돌아왔을 때 나는 그 책들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 역시 그렇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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