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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과 홍종우의 가상대담
조국 근대화를 위한 서로 다른 길
[141호] 2007년 05월 07일 (월) 한성민 본교 사학과 강사

고균(古筠) 김옥균, 우정(羽亭) 홍종우는 이미 2005년 11월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조재곤, 푸른역사)의 지면을 통해서 김옥균의 죽음 이후 110년 만에야 만나 대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근대사를 연구하는 나로서는 두 사람이 워낙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인지 진정 속에 있는 이야기를 모두 다 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이 두 사람이 반드시 한 번 더 만나 이야기를 나누길 바라는 마음에 이와 같은 자리를 마련했다.

홍종우는 조불조약(1886)이 체결되는 자리에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1890년 유학을 하게 되었다. 유학중 기메박물관에서 일하는 동안엔 『춘향전』과 『심청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한국문화를 알리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1893년 여름에 귀국길에 올라 이일직과 의기투합하여 1894년 상하이에서 고균 선생을 암살하였고, 이를 계기로 관직에 등용되어 황실파 관료로 군주권의 강화와 자주적 근대화를 위해 활동했다.

근대사연구자 : 본격적인 대담으로 들어가 볼까요? 우선 피해자이신 고균 선생께서는 어떻습니까? 억울하지 않으신가요?

고균 선생 : 글쎄요. 뭐… 암살당한 입장에서 억울하지 않을 수야 있나요. (웃음) 그러나 이미 암살에 대해서는 지난번 대담에서 서로 풀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원한은 없습니다. 다만, 중국에서 리훙짱(李鴻章)을 만나 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못한 것이 아쉽지요. 또 우정 선생이 자신의 우국충정에 대해서 사전에 속을 터놓고 이야기 했었다면 하는 미련은 있습니다.

근대사연구자 : 그렇군요. 고균 선생께서 더 이상의 원한은 없다고 하시니, 우정 선생께서는 암살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우정 선생 : 제가 프랑스생활을 마치고 일본에 도착한 1893년 12월 이일직 씨가 나를 찾아와서 역적 김옥균과 박영효를 죽이는 것이 상감의 뜻이라고 하기에 그와 뜻을 합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고균 선생이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경계하기에, 제가 프랑스를 유학한 개화엘리트를 자처하며 접근해서 암살하기로 하고, 이일직 씨 등은 박영효 씨 쪽을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고균 선생에게 세계정세를 설명하며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중국으로 가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어떠한가, 특히 제가 주일청국공사로 있던 리훙짱의 아들 리지잉팡(李經邦)과 친분이 있기 때문에 리훙짱과의 만남 주선을 제안했습니다. 이에 동의한 고균 선생이 1894년 3월 중국으로 가게 되었고, 저는 그에 동행해서 계획대로 상하이에서 암살한 것입니다.

근대사연구자 : 망명 초기부터 조선정부가 보낸 장은규나 지운영 같은 자객으로부터 고균 선생에 대한 계속적인 암살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경계하셨을 법도 한데, 우정 선생께서 암살을 목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고균 선생 : 어느 정도는, 아니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저한테 우정 선생을 소개한 사람이 이일직 씨입니다. 그것이 1894년 초인데, 그동안 계속 암살위협에 시달린 제가 불과 2개월도 안 되는 친분으로 우정 선생을 신뢰하기에는 무리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정 선생을 소개한 이일직 씨에 대해서는 박영효 군이나 저나 항상 경계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소개한 사람인데 오죽할까요? 또 리지잉팡과의 친분을 내세워 제게 접근했지만, 저는 이미 오가사와라 섬의 유배시절부터 중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리지잉팡이 주일청국공사로 부임한 1890년 말부터 친분을 나눠왔어요. 그런데 그 동안 리공사로부터 우정 선생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어요. 저에게 접근하기 위한 거짓이었겠죠, 그렇지 않나요?

근대사연구자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우정 선생께서 2년간 일본에 체류하다가 프랑스로 떠난 것이 1890년 가을입니다. 리공사가 일본에 부임하는 것이 그 즈음이고, 우정 선생께서 일본으로 돌아오는 것이 1893년 말인데, 리공사는 그해 7월 이미 본국으로 돌아갔으니 시기적으로 만날 기회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우정 선생 : 허허. 이거 참… 예, 맞습니다. 리공사와의 친분은 없었습니다. 암살 후 저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민영준 씨가 어떻게 김옥균을 암살했냐고 묻습디다. 그래서 기왕이면 제 입지를 좀 높이려고 과대포장을 한 것이죠. 그런데 고균 선생께서 그걸 알면서도 저와 동행했다는 건가요?

고균 선생 : 그렇습니다. 리공사는 귀국한 이후로 계속해서 저에게 초청장을 보내왔어요. 제가 중국에 가는 것에 대해 주변에서는 만류가 많았지만, 저는 반드시 가야했습니다. 동아시아 3국이 대립해서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興亞之意見」을 써서 동아시아 3국이 힘을 합쳐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는 三和主義를 주장했습니다. 특히 제국주의화 되어가는 일본을 목격하면서, 더 늦기 전에 리훙짱과 담판하고 싶었죠. 그런데 중국에 갈 경비가 문제였습니다. 나름대로 외교담판을 위해 가는 길인데, 초청장을 보내온 리공사에게 경비까지 부탁해서야 대등한 담판이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던 차에 이일직 씨가 우정 선생과 동행하는 조건으로 경비를 부담하겠다고 자청했지요.

근대사연구자 : 암살의도를 알고 있음에도 동행했고, 경계했음에도 암살당하셨다는 말씀이네요.

고균 선생 : 그렇지요. 이미 알려진 위험은 위험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만약을 위해 일본에서의 신변정리를 다하고 떠난 길입니다. 하지만 백주대낮에 그것도 이름난 일류 호텔에서 과감하게 암살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근대사연구자 :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우정 선생께선 고학으로 프랑스 유학을 할 정도로 서구문물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군요. 그렇다면 고균 선생과도 어느 정도 의견이 통할 것 같은데, 왜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신 겁니까?

우정 선생 : 기본적으로 근대화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고균 선생의 방법은 아주 잘못되었습니다.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문명개화론에 함몰되어 오랜 군주국가라는 당시 조선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성급하게 근대화를 추진하려다가 실패하고 말았지요. 무엇보다 일본이란 외세에 의지해서 정변을 일으킨 것이 문제입니다. 군주에 대한 반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략을 더욱 가중시킨 결과를 가져왔어요.

고균 선생 : 예. 정변을 성급히 추진하다 실패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우정 선생께서 당시 조선의 현실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임오군변 이후 중국은 조선과 朝淸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면서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명문화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파견하여 조선의 실질적인 식민지화를 급속하게 추진했습니다. 만약 더 기다렸다면, 우리 개화파는 정변을 실행해보지도 못하고 중국세력과 민씨 일족들에게 죽임당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兪吉) 선생으로부터 문명개화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을 너무 믿었다는 지적은 잘못되었습니다. 오히려 일본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정부의 훈령을 가지고 오는 우편선 치토세마루(千歲丸)가 도착하기 전에 정변을 일으킨 것이죠. 또 당시 일본의 군사력은 자국의 치안유지를 위한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일본이 더 강해지기 전에 신속히 근대화를 추진해서 외세에 맞서려 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힘을 빌리기는 했지만, 임오군란 때의 친중국파나 갑오농민전쟁 때의 민씨일족이 중국을 끌어들일 때와는 달리 우리는 정변 과정에서 일본에게 주도권을 내준 적이 결단코 없습니다.

근대사연구자 : 논의가 자연스럽게 근대화의 방법 문제로 옮겨지는데요. 우정 선생께서는 근대화에는 동의하지만, 방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우정 선생 : 제가 생각한 근대화는 정변과 같은 혁명적 방법이 아니라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외세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하고, 상하 신민이 하나가 되어 추진하는 점진적이며 자주적인 근대화입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왕권의 권위를 높이는 작업의 일환으로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변경해서 황제국이 될 것을 건의했고, 열강의 개입을 근절하기 위해 여러 차례 상소를 통해 도성 안에서 열강의 상인들을 철수시킬 것을 주장했습니다.

근대사연구자 : 우정 선생의 말씀은 옳습니다만, 저한테는 상당히 감상적으로 들리는데요. 예를 들자면 열강의 상인들을 철수시키는 구체적인 방법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미 1880년대부터 제기된 문제였고, 1890년까지 서울상인들은 외국상인의 철수를 요구하며 3차례의 철시투쟁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조약상의 문제와 철수경비 조달의 문제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용산까지 개항장으로 내주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독립신문에서도 선생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 아닌가요? 선생께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까?

우정 선생 : 솔직히 구체적인 방법까지 고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모두가 힘을 합칠 수만 있었다면 가능했을 것입니다. 개화만을 만능으로 생각한 문명개화론자들과 외세에 기생한 민씨 일족들이 도와주지 않아서 실현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던 거군요.

근대사연구자 : 그럼 이번에는 고균 선생께 여쭈어보겠습니다. 갑신정변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이 있는데, 어떠신가요?

고균 선생 : 우리가 정변을 일으켰지만, 군주권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민족의 수직적 통합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신분제를 철폐하려 했고, 군주권을 제한하려고 한 것입니다. 프랑스가 혁명의 과정에서, 그리고 이후 주변 국가들의 방해를 극복하고 혁명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분제 철폐를 통해 국민국가라는 바탕 위에서 민족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 모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은 서구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으로부터도 압박받기 시작하고 있었고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신분제 철폐를 바탕으로 한 급속한 근대화와 군주권의 제한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프랑스에 유학해서 계몽주의 사상을 배운 우정 선생은 군주권의 강화를 주장했습니다. 솔직히 우정 선생이 지키려고 한 것이 국권인지 군주권인지 궁금합니다.

우정 선생 : 물론 프랑스의 경우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그 혁명의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렸고, 여러 차례 정체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잠재적으로 프러시아처럼 강력한 왕권을 배경으로 한 리더십 아래 외세의 간섭과 내부의 혼란을 최소화하는 점진적인 근대화를 생각했습니다.

근대사연구자 : 이렇게 되면 두 분의 차이는 결국 군주권과 외세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정리가 되는데요. 우정 선생께서는 고종황제를 계몽주의 전제군주라고 했던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대왕에 비유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당시 왕권을 지키기 위해 외세에 막대한 이권을 허용하고 그에 대한 상납금을 챙겼던 고종은 이미 공적 권력이라기보다는 사적 권력의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우정 선생께서는 열강의 배제를 줄곧 주장하셨는데, 당시 고종의 모습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요?

우정 선생 : 한국식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군주권의 강화가 가장 시급한 요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황실의 최측근 관료로 활동하며 황국협회를 주도하여 군주권을 제한하려는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데 선봉에 서서 활동했지요. 하지만 고종황제의 생각이 제 뜻과 같지는 않더군요. 솔직하게 말해서 잘못 판단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근대사연구자 : 역시 그렇군요. 다음은 외세 인식의 문제인데 우정 선생께서는 줄곧 열강의 배제, 외세의 배제를 주장하셔서 그 입장이 분명합니다. 반면 고균 선생에 대해서는 외세의존적이라거나 친일파라고 하는 시각이 일각에서 여전히 존재합니다.

고균 선생 : 그런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정 선생도 원칙적으로 일본과의 협력은 인정하지만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기 때문에 협력은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이와 비슷합니다. 일본은 근대화의 참고의 대상이자, 협력의 대상이었습니다. 제가 주장한 삼화주의는 동아시아 3국의 대등한 협력이었지, 일본을 맹주로 한 대아시아주의가 아닙니다. 더욱이 제가 죽고 국권이 병탄된 후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식민통치를 위해 삼화주의를 일본제국주의가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의 선구로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을 바탕으로 저를 평가해서는 곤란합니다. 갑신정변 때 발표한 ‘정강14개조’의 제1조는 대원군의 송환입니다. 중국은 한 나라의 국왕의 생부를 불법적으로 납치, 연금했습니다. 이것은 명성황후의 시해와 마찬가지로 절대 묵과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국제적으로도 국가의 위신이 달린 문제였지요. 그래서 대원군이 우리와 정치적 입장은 정반대였지만, 그의 송환을 가장 시급하게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원군의 송환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이 국왕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은 자신의 왕위 유지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제거하려 했고, 왕위 유지에 도움이 된다면 그 누구에게도 의탁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외세의존적이었던 인물은 오히려 고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사연구자 : 네. 두 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시의 근대화 노력들을 평가내릴 수는 없지만,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신 두 분의 의견은 한국근대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성민 (본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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