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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 삶의 방향을 정하고 틀어버린 책들
내 인생의 책
[196호] 2016년 06월 13일 (월) 오 은 시인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글 쓰는 생활을 한 지 3년 반이 흘렀다. 책 읽는 시간은 예전보다 현저히 줄어들었다. 책 욕심이 많아서 신간이 나오면 무턱대고 사기 일쑤지만 표지도 못 열어보고 지나치는 책들도 꽤 생겼다. 어느 날엔가는 대청소를 하다 인터넷 서점에서 배송된 상자를 발견하기도 했다. 심지어 지난 계절에 주문했던 책들이었다. 그 뒤로 어떻게든 책과 멀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틈나면 책을 읽던 내가 어느 날부턴가 틈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애써 기다리지 않게 된 셈이다. 이동하는 시간 동안 휴대폰에 집중하는 대신, 책을 들여다보기로 마음먹었다.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읽기에 좋은 책, 공원 벤치에 앉아 읽기에 좋은 책, 잠자기 전 읽기에 좋은 책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 인생의 책이라고 말하니 자못 거창하지만, 내가 지금 시를 쓸 수 있게 만들어준 책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한결 놓인다. 나는 순간(moment)들을 사랑한다. 매일매일 내게 자극이 되는 순간들을 거리낌없이 마주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찾아 나서려고 한다. 그 순간들이 모여 나를 구성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전환점(momentum)을 몸에 새기려고 애쓴다. 그 당시에는 잘 모르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그 순간이 내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나가는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게 된 것도, 골목길에서 나누는 아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도, 말들을 늘였다 줄였다 뗐다 붙였다 블록처럼 가지고 놀게 된 것도, 마침내 시를 쓰게 된 것도 결국 전환점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전환점들을 마련해준 것들은 거의 모두 책이었다.

 셜록 홈즈는 내 어릴 적 우상이었다.『셜록 홈즈의 모험』에 수록된 단편 「보헤미아 왕국 스캔들」을 나는 아주 좋아했었다. 내용은 분명하게 생각나지 않지만, 거기서 홈즈가 왓슨에게 했던 말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자네는 눈으로 보긴 하지만 관찰하지는 않아. 그런데 본다는 것과 관찰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과정이지.” 언젠가부터 나는 홈즈의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다닌 것 같다. 계단에 오를 때면 그것이 몇 개인지 머릿속으로 셌고, 아빠의 셔츠와 구두를 보고 어디에 다녀왔는지 추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빈약한 추리력으로 인해 내 예상은 매번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러나 셜록 홈즈 덕분에, 아니 셜록 홈즈를 만들어준 코난 도일 덕분에 초등학교 내내 나의 장래희망은 탐정이었다. 관찰하려는 마음, 들여다보려는 습관을 그때 키울 수 있었다. 사람들이 불쑥 내뱉는 말 한마디, 뜨거운 것을 한 번에 들이켰을 때의 표정, 기지개를 켤 때 내는 기괴한 소리 같은 것이 내 시의 밑거름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 백일장에 나간 적이 있었다. 나는 원고의 도입부에 “하늘에 돌을 던지면 쨍그랑 하고 깨질 것만 같았다.”라는 문장을 썼다가 호되게 혼이 났다. 당시 학생들을 인솔했던 선생님은 내게 하늘을 올려다보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저런 하늘이 깨질 것 같니?” 풀이 죽은 나는 우물거리며 겨우 대답했다. “얼룩이 많다고 해서 유리창이 깨지지 않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글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어 이런저런 소설을 읽다가 다음의 문장을 발견하기 전까진 말이다. “진짜의 나는 안타까이 더듬어보는 먼 기억의 갈피짬에서 단편적인 감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오정희의 『유년의 뜰』은 ‘진짜의 나’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해준 소설집이자 한국어로 쓰인 문장들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일깨워준 책이다. 나는 막연히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잠깐이긴 했지만 문예반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저 문장에 쓰인 “갈피짬”이 뜻하는 것처럼, 일상에 틈을 내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기도 했다.

 2002년 봄, 시인이 되었다. 당시의 나는 시인이 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시도 쓰지 않았다. 대학 신입생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양 매일같이 술만 마셨고 그렇게 좋아하던 소설도 어느새 멀리하고 있었다. 2004년 가을, 또 한 번 전환점이 찾아왔다. 원고 청탁이라는 것을 사실상 처음 받은 뒤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며 이런 느낌이 들고 만 것이다. ‘나 평생 이거 안 하면 안 될 것 같다.’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며 그제야 나는 예전 시집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렇게 치열한 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에 한없이 부끄러웠다. 

 2007년에 출간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선집 『끝과 시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들 중 하나다. 쉼보르스카의 등단작이기도 한 「단어를 찾아서」는 내 시적 고민과 가장 맞닿아 있는 시라 아직도 종종 읽곤 한다. “온 힘을 다해 찾는다./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찾을 수가 없는데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데도 나는 계속해서 찾고 있다. 더 정확한 말이, 더 적절한 말이, 그러면서도 김수영의 말마따나 “자기의 땀내”가 느껴지는 말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그 말을 할 것이다. 그런 시를 쓸 것이다. 

 좋은 책은 일상에 균열을 내주는 책이다. 더 좋은 책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에야 밝혀진다. 사람들은 그 책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삶의 방향을 정하거나 틀어버리기도 한다. 자기의 인생에 금이 가버렸다는 것을, 그 금을 뚫고 영혼이 불쑥 솟구쳤다는 것을 한발 늦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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