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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산책] 자본주의적 유한성의 시대, 라깡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
정신분석과 일상의 정치학
[196호] 2016년 06월 13일 (월) 백상현 정신분석학자, 작가
   
 

△ 로고스가 가진 균열점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 변증술의 핵심이라면, 에셔의 그림에서 우리는 논리적 구성의 균열을 볼 수 있다. 

 

지금, 이곳, 우리의 세기

 21세기를 유물론적 유한성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에 이견이 없어 보인다. 더 이상 신이나 진리 따위의 형이상학적 신념은 합리주의적 이성의 공동체들에서 추방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을 증식시키는 투자 기술과 그렇게 증식된 재화의 풍요 속에서 쾌락의 최대치에 도달하기 위해 고려되는 신체와 심리에 관한 자기관리의 과학일 뿐이다. 여기서의 정치는 개인의 신체에 관련된 쾌락의 권리, 즉 생명과 신체의 자유로운 운용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어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으며, 상대주의의 꼬리표를 달고 출현하는 윤리는 벤담 식 공리주의와 함께 상품가의 논리 속에서 정교하게 세공되어가는 양상이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상호적 욕망의 조율이며, 불간섭 원칙에 기반을 둔 쾌락의 나눔 이상의 성격을 갖지 않게 되었다. 예술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유희의 차원에서 보다 고상한 환상을 포함하는 특수한 엔터테인먼트로서 기능하며, 엔터테인먼트 일반의 콘텐츠들이 그러하듯이 오직 투자대상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유물론적 패러다임은 궁극적으로 쾌락원칙과 현실원칙, 즉 엔트로피적 항상성의 원리에 기반한 한정된 민주주의를 약속하고 있다. 

 우리가 속한 21세기형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유물론적 틀을 한계 짓는다. 모든 것은 선명한 상품가를 통해서 재현되며, 불확실성이란 오직 투자 영역에서 출현하는 유동성, 우연성을 지칭하는 역설적이게도 선명한 이름 이상이 될 수 없다. 이 같은 시대에 인문학은 삶을 주어진 조건 속에서 가능한 풍요로울 수 있도록 하는 특수한 심리학이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이것이 시장경제와 기업문화 속에서 다루어질 때에는 새로운 이윤 창출 패러다임을 위한 유사-창의적(pseudo-créationniste) 사고력 개발의 과학이 된다. 인문학 또한 그것의 기원에 존재했던 불안의 토대를 거세당하는 조건 속에서만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21세기적 유한성에 대항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존속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한가운데로 불러들여 젊은이들을 타락케 했던 바로 그 ‘불안의 공백’을 다시는 소환하지 않겠다는 조건 아래에서, 인문학은 백화점과 문화센터의 한구석에 자신의 초라한 강의실을 보존할 수 있었다. 대학이 사유의 전복적인 가능성을 포기하고, 취업률이라는 종교에 영혼을 팔아버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시장경제가 마케팅을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이곳이, 지금 내가 그리고 여러분이 인문학을, 그것도 라깡이라는 오래된 유령에 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는 장소이며 시간이고, 그곳에 주어진 조건들이다. 

라깡 임상 이론의 정치성

 리요타르는 「분쟁Le différend」에서 세계를 문장들의 투쟁으로 묘사한 바 있다. 세계가 특정한 형상으로 출현하여 인지되기 위해서는 역시 특정한 문법에 의존하는 방식을 통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때 세계를 출현시키는 특정 문법의 문장이 곧 패러다임이다. 패러다임적 문장은 필연적으로 소수자적 문장들을 억압하면서 분쟁을 야기한다. 이 같은 억압의 과정에서 잠시 출현하는 것이 간극, 또는 공백이다. 이것은 분쟁이 그곳에 존재했음을 표지하는 일종의 증상적 지표인데, 지배적 패러다임은 이러한 증상을 철저히 억압하는 전략을 구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오늘의 지배적 문장, 즉 패러다임은 자본주의 담화이다. 유한성의 21세기는 철저히 상품가의 패러다임 속에서 존재의 흔들림을 포획하여 수치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가 가진 무한성은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상징화되며, 유한성의 협소한 공간으로 폐쇄된다. 이러한 표현이 낯설다면, 아주 평범한 표현을 쓸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수능점수나 취업률 또는 연봉의 수치가 표지하는 한계 너머로 사유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상품가의 패러다임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사유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게된 21세기의 인류는 자본주의적 고전주의의 문법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라깡의 정신분석 임상이론이 인문학적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소외의 상황 속에서이다. 임상이론에서 소외aliénation라는 개념은 주체의 존재가 언어에 의해 남김없이 분절되어 주이상스가 핍진화되는 단계를 가리킨다. 바로 이러한 욕망의 부재를 보충하기 위해 주체는 대상a라고 하는 충동의 흔적을 욕망의 형식으로 추구한다. 

 그런데, 강력한 상징계는 대상a의 향방을 오직 팔루스의 지향점을 중심으로만 허용한다. 여기서 팔루스라는 정신분석 개념은 주체의 욕망을 사회-문화적 고정관념의 틀로 사로잡고 유형화하는 것, 즉 욕망의 일자와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부계사회에서 주체의 욕망은 ‘아버지-판본’에 의해서만 기능하게 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모두의 욕망은 유사한 궤적을 그리며 유한성의 테두리를 맴돌게 된다. 자본주의 담론 역시 마찬가지 기능 속에서 21세기적 주체의 소외를 보충한다. 주체는 자신의 텅 빈 주이상스의 불만족을 보충하기 위해 자본주의 담화가 허용하는 욕망의 대상을, 상품의 형식인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욕망의 대상a는 그것이 가진 고유한 불안정성을 상품가의 담화를 통해 안정화시키면서 주체의 욕망이 가진 통제 불가능성을 통제하는 기능을 떠맡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안정화의 기능을 위반하여 횡단하는 것이 라깡적 임상전략이다. 라깡은 패러다임의 담화가 증상을 사로잡고 안정화시키려는 시도에 맞서 오히려 증상 자체가 가진 불안정성을 유지한다. 이를 통해 패러다임의 환영적 권력을 횡단하는 것이 임상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횡단된 환상의 장소 저편에서 주체가 만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울의 단계이며, 환멸의 공간이며, 의미의 텅 빈 공백이다. 정신분석 임상은 바로 이 지점으로 환자를 데려가기 위해 상징계로부터 파생되는 환영들의 고착과 싸우며 그들을 넘어서려고 했던 것이다. 미시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정신분석의 이같은 투쟁이 사회-공동체적 차원에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한 교훈의 수준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그것은 현행 사회의 지배적 담화가 강제하는 디렉션을 일탈하려는 시도만이 우리가 스스로의 욕망에 관하여 취할 수 있는 유일하게 윤리적인 포지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의 임상 치료 과정에서 환자가 도달한 공백은 그의 현재를 지배하는 상징계의 틀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상징화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다(새로운 자아의 출현). 마찬가지로, 지배적 패러다임의 균열점에 도달하여 분쟁의 지표와 마주한 사회적 주체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상징화를 시도할 수 있을 가능성의 지점에 도달한 것이라고 간주된다(새로운 세계-패러다임의 출현).

소크라테스와 라깡, 저항의 보편성

 현재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유한성은 역사 속에서 인간 주체를 사로잡았던 수많은 유한성들의 21세기적 판본에 불과하다. 그것을 라깡의 분석담화, 무한성 담화인 그것에 의존하여 횡단하려는 시도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현재의 한계가 아닌 미래의 가능성에로 개방하려는 투쟁의 역사적 흔적들을 다시 반복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미래로 존재를 개방한다는 것은 주어진 조건에 사로잡히는 대신 새로운 나 자신을, 새로운 공동체를 욕망한다는 아주 상식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소피스트들의 속견에 지배되는 아테네의 현실주의 정치이론에 맞서 보다 확장된 공동체를 요구했던 소크라테스의 담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유한성 담론이 어떻게 실용주의의 탈을 쓰고 하나의 권력으로 기능하는지를 간파한 최초의 인문학자였다. 주어진 현실의 담론에 존재를 종속시키는 것이 결단코 인간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한 최초의 철학자였던 것이다. 그는 주어진 언어가 아닌 도래할 언어에 존재의 내기를 걸었으며 이를 위해서 주어진 담론들의 균열점을 찾아내어 돌파하는 변증술을 논박의 무기로 택한다. 고정관념의 권력에 대항하고 그것의 로고스가 가진 균열점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 변증술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새로운 세계 출현의 조건인 새로운 관념들의 발명은 바로 그러한 균열점을 주어진 상징계의 끝이자 도래할 새로운 상징계의 시작점으로 파악하려는 투쟁 속에서만 가능하다. 

 21세기 자본주의적 유한성의 한가운데서 라깡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투쟁에, 존재의 개방을 위한 프로젝트에, 인문학이 탄생한 이래 단 한번도 포기되어 본 적이 없는 가장 인간적인 삶의 실천에 참여한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의미를 담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이것이 정신분석을 연구하는 한 학자가 일상 속에서 진리를 욕망하는 어느 독자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그러나 빠뜨려서는 안 될 라깡 이론의 논점punctum이라고 생각된다. 라깡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란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 인문학적 전통이 가진 보편성을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매혹으로 변주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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