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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세월호 이후의 삶
[195호] 2016년 05월 09일 (월)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Edvard Munch, <By the Deathbed>, 1893

 

  최근 가장 기뻤던 뉴스는 ‘세월호 변호사’ 중 한 명인 박주민 변호사가 총선에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소식이다. 집권여당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당 소속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가 국회의원이 되지 못하는 것보다는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가장 슬펐던 뉴스는, 선거 기간 동안 세월호 유가족이 도라에몽 인형탈을 쓰고 박 후보를 도왔다는 보도였다. 박주민 선거 캠프의 최일곤 씨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다.

  “유가족들은 자신들이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까봐 묵묵히 주어진 일만을 하며 지냈다. 영석이 엄마는 아침 일찍 나와 밀걸레질을 하며 청소를 했다. 그리고는 전화기 앞에 앉아 전화를 걸어 하루 종일 박주민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영석이 아버지는 투표독려 운동을 하기 위해 아침부터 길거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또 해가 질 때까지 인형탈을 쓰고 온몸이 땀에 젖도록 춤을 췄다. 그들은 그렇게 고된 하루를 보내고 말없이 근처 모텔로 돌아갔다가 다음날 다시 나왔다. 박주민은 자신을 위해 인형탈을 쓰고 춤을 추는 영석이 아버지를 보면서 가슴 아파했다. 2년 전 4월 16일 이후, 춤을 출만큼 즐거운 일이라곤 없었던 영석이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그것도 인형 탈을 쓰고 춤을 추는 것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받아들이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당연하다. 모두가 유가족이 느끼는 정도로 절실하게 아파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여전히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옷이나 가방에 달거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왜인가? 세월호 참사는 지진, 해일, 화산폭발 같은 자연재난이 아니었다. 인간의 탐욕과 국가의 무책임이 제도적 공백에 요철처럼 딱딱 끼워지며 벌어진 인재였다. 배가 전복한 경위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이후 구조과정에서 수많은 부조리들이 속속 드러났고, 사람들은 글자 그대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세월호 참사는 체제가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지식인들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지목하길 좋아했다. 철학자 한병철은 “세월호는 신자유주의의 소우주”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소위 신자유주의 시대 이전에도 이런 사고는 있었다. 140명이 사망한 1963년 목포 ‘연’호 사고, 319명이 사망한 1970년 제주 남영호 사고, 아파트 한 동이 통째 무너져 내려 33명이 사망한 1970년의 와우 아파트 사고, 32명이 사망한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등이 모두 신자유주의 때문인가? 물론 신자유주의를 비판해야할 맥락도 있지만, 모든 악의 근원을 신자유주의로 수렴시키는 저런 관성적인 비판은 이제 지양할 필요가 있다. 

  한편, 신자유주의가 아닌 ‘천민자본주의’를 세월호 참사의 원인으로 꼽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돈 때문에 생명을 희생시킨 것에 사람들이 분노하자 천민자본주의, 혹은 한국 자본주의의 ‘미개함’과 ‘후진성’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착한 자본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한국사회는 합리적·선진적 자본주의에 미달하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는 논리였다. 이들의 가장 큰 착각은 룰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업자에게 강한 페널티가 주어지고, 룰을 제대로 지키는 게 실질적 이익이 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의 합리성’에서 비롯된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손’엔 눈이 달려 있지 않아서 인간의 생명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본 자체의 무한한 축적을 위해 운동할 뿐이다. 우리가 선진국이나 복지국가라 부르는 곳들은 자본주의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사회가 아니라 자본의 본성을 여러 사회적 장치로 제어하는 사회다.

  ‘세월호 체제’의 뿌리는 자본주의의 ‘단계’보다는 ‘성격’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건국 이후 지금까지 지속된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을 건조하게 서술하면 요소동원형 경제라 할 수 있다. 부존자원이나 혁신적 기술이 없으니 인간의 노동을 물리적 극한까지 뽑아내야 하고, 국가와 재벌의 유착을 통해 ‘선택과 집중’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그것을 쉽게 표현하면 ‘인간을 갈아 넣는 자본주의’다. 이건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사실의 진술이다. 노동자가 3시간에 한 명씩 죽고 5분에 한 명씩 다치는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재사망률 부동의 1위다. 이렇게 한국의 자본주의는 (물질적 성장이라는) 목표를 빨리 달성하기 위해서 뒤처지고 약한 인간을 희생시키는 게 일상이 된 체제다. 이 강렬한 물질주의 혹은 ‘먹고사니즘’이야말로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 배경을 해명하는 열쇠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공감과 인정이 인식에 선행한다”고 했다. 그냥 “인정이 선행한다”로 요약되기도 한다. 따지고 분석하는 것보다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흉내내는 행동이 먼저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위나 행위 윤리로서 주장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인간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테제의 타당성을 떠나서, 저 주장이 우리에게 어떤 휴머니즘적 위로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할 것은 공감과 인정 이후에 인식이 ‘후행’한다는 사실이다. 호네트에 따르면 ‘인정 없는 인식’은 불가능하다. 그럼 ‘인식 없는 인정’은? ‘인식이 과부족한 인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무척 일반적인 현상이다. 사유 없는 공감과 동질성의 강조. 이것이 바로 정치의 도덕화, 이분법적 진영투쟁, 극단적인 피해자중심주의의 휴머니즘적 기반이다.

  세월호 참사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많은 평범한 시민들이 “이제 그만하자. 경기도 안 좋은데 언제까지 슬퍼하고만 있어야 하나”라고 했을 때, 이들 전부 공감능력이 결여된 소시오패스라서 그리 말한 것일까. 그 시민들 역시 처음에는 모두 참사의 희생자들과 유가족에게 공감했을 것이다. 즉, ‘공감과 인정이 선행’했다. 그러나 이후에 따라온 인식, 그게 문제였다. 특정한 인식체계가 다른 인식들을 집어삼켜버렸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특정한 인식이란 경제성장과 효율성을 지상과제로 삼는 물질주의, 먹고사니즘 같은 것이다. 이 또한 ‘인식이 과부족한 인정’의 일종이다.

  사건의 인과를 추적하고, 책임져야할 자에게 책임을 지게 만드는 것은 단기적으로 우리가 해나가야 하는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겠지만 거기에 머무르면 제2, 제3의 세월호 참사는 또 일어난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애도하는 행위가 진정으로 의미 있으려면 우리 사회가 지금껏 고수해온 삶의 태도를 전환해야 한다. 인간을 갈아넣는 체제에서 인간을 위하는 체제로 옮겨가는 것, 그것이 세월호 참사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최종 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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