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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지금-여기, 푸코의 계보학
[194호] 2016년 03월 21일 (월) 이철호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교수
   

△ Michael Burris Johnson, <Cage>, 2013년 作 

 

 1. 오래된 기시감, 1984년의 영국
  <빌리 엘리어트>는 한국인의 정서에 친숙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탄광촌에서 자라나 ‘발레리노’를 꿈꾼 한 소년이 마침내 예술극장 무대에서 멋지게 도약하는 마지막 장면을 지켜보며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한국 관객은 아마 없으리라. 기성 세대가 되물림한 경제적 궁핍과 성적 편견이라는 이중의 장애를 딛고 자신의 예술적 열망을 이루어낸 빌리의 이야기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기 마련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섣불리 좌절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해주는 듯하다. 최근까지도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공연이 심심찮게 이어지는 것은 그 성공스토리가 지닌 보편적인 메시지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좀더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 영화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툴지만 어렵게 한 발을 내딛은 청소년들에게 관대하지도,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소외계층을 향해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영화도 아닐 수 있다. 빌리의 왕립발레학교 합격통지서는 하필 탄광노조파업이 실패로 끝나버린 날 전달되고, 그래서 빌리의 성공을 전경화하는 무대 뒤편의 탄광노동자들은 이전보다 더 극심한 궁핍과 좌절감에 시달려야 한다. 영화의 모티프대로 탄광촌 무리에서 ‘백조’는 빌리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빌리 엘리어트>는 빛나는 재능을 지닌 개인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자기구원도 불가능한 신자유시대의 서막을 극화하고 있다. 이 영화가 계속해서 호소하는 ‘여성적인 것’(부재하는 어머니 또는 예술적 자아를 후원하나 현실에서는 억압된 여성성)도 당대 영국사회의 맥락에서는 결국 ‘마가릿 대처’로 현현되는 셈이다. 집권 직후 마가릿 대처 정부의 대규모 탄광폐쇄정책은, 1970년대에는 오히려 정부를 압도했던 바로 그 노조에 대한 응징이면서 신자유주의 이후 장기화될 경제불황의 전조였다. 그런데 이 영화의 배경인 탄광노조파업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1984년은 공교롭게도 바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

  2. 되돌아온 푸코
  1990년대를 지나온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푸코와 그의 계보학이 지닌 의미는 각별하다. 그의 주저 『광기의 역사』(1961), 『말과 사물』(1966), 『감시와 처벌』(1975)를 비롯한 다수의 논저들이 한국 인문학에 남긴 영향의 흔적은 명백하다. 일례로 『근대주체와 식민지규율권력』(문화과학사, 2003)의 출간 이후 ‘식민(규율)권력’이라는 용어는 한국근대사의 주요 키워드로 널리 활용되었고 그 이론적 원천은 물론 푸코에서 연유한다. 한국문학의 경우, 푸코의 영향력은 직접적이라기보다 일본비평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을 거쳐 더욱 가열되었다.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 1997)에서 발견한 푸코 효과를 고스란히 한국문학에 대입하려는 연구들이 상당기간 이어졌을 만큼 놀라운 파급력을 발휘했다.
  1990년대 후반에 연구를 시작한 세대로서 때로는 간접적으로 때로는 직접 원전을 찾아가며 학습했던 이들에게 푸코는 하나의 전설이라 해도 과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전설이라 함은 이미 한 시대를 관통한 이론으로서의 권능을 예찬하는 말이면서도 어느 정도는 현실적인 시효만료를 뜻하기도 한다. 푸코와 더불어 식민지기의 한국 근대문학 연구에 골몰했던 시절을 지나, 어느 순간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를 물어야 했을 때 이미 내 손에 푸코는 쥐어져 있지 않았다. ‘규율’이나 ‘파놉티콘’을 이야기하면서 푸코의 묵직한 존재감을 여전히 실감하기는 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이론가에게 다시 몸을 의탁할 엄두가 나지는 않았다고 해야 할까. 그런 푸코가 더 강력해져서 돌아왔다. 이른바 ‘통치성(governmentaility)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아니 우리에게 되돌아온 푸코는 더 이상 지난 20세기의 사상가일 수 없다.

  3. 알튀세르와 푸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인상적인 서문에서, 철학자 진태원은 알튀세르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자서전에서 연출한 드라마틱한 반전에 주목한다. 1980년 정신착란 상태에서 아내를 교살하게 된 내력을 성장기의 체험을 통해 고백한 자전적 이야기의 결말에 이르러 돌연 저자는 이제까지의 모든 것을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이야기로 바꾸어놓는다. 만일 자서전이 “하나의 주체로 태어나게 되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호명의 성공에 관한, 정상적인 주체로 호명되기에 성공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진태원, 「이것은 하나의 자서전인가」, 권은미 옮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이매진, 2008, 19쪽). 바로 이 지점에서 알튀세르는 그의 ‘자서전’을, 자신이 고안해낸 ‘호명’ 개념을 스스로 배반해버린다. 불안한 삶의 한가운데에서 극적으로 연출해낸 알튀세르의 이 자기패러디는 ‘자서전’을 자서전으로 포장하지 않고, ‘호명’ 개념을 이데올로기의 포화 속에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비범한 의지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흥미롭게도 자신의 스승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 후반 이후의) 이른바 ‘후기 푸코’는 그 이전의 푸코를 배반한다. 푸코의 주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공공연한 비난은 그의 권력론이 국가나 사회 같은 포괄적인 정치 문제를 조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개인의 자율성을 제거한다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2003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에 따르면, 푸코는 자신의 말년에 수행한 연구들에서 사실상 이러한 비판과 공격을 단숨에 뛰어넘어 하나의 웅장한 스케일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주체의 계보학을 본격적으로 탐구한 저작으로 정평이 난 『성의 역사』는 그 장중한 사상적 볼륨의 일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4. 프로젝트의 도시(cité par projets): 신자유주의 그리고 통치성의 철학
  <빌리 엘리어트>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대사는 춤을 출 때 어떤 기분이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대한 빌리의 답변일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이 고백은 어떤 예술적 행위에 몰입한 상태를 뜻하지만 동시에 자기 가족과 공동체가 분담해야 할 사회적 저항의 망각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영화를 통틀어 최악의 춤을 보여준 오디션이었음에도 결국 빌리가 합격한 이유, 그리고 빌리 부친에게 파업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면접장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성공의 길이 열려 있다고 종용하는 그들 면접관이 실은 파업노동자들의 목을 조르는 대처 정부의 또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빌리의 성공’과 ‘파업의 실패’는 서로 교환되는 것이다: 개인의 자아실현과 공동체의 미래가 양자택일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시대.
  한국에서도 『안전, 영토, 인구』(2011), 『생명관리정치의 탄생』(2012),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이상 난장, 2015) 등의 번역에 힘입어 통치성 연구의 한국적 버전들이 활발하게 제출되고 있다. 이 강연록에서 푸코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는 복잡다단한 삶의 세계를 경제적 행위로 환원하려는 신자유주의를 겨냥한다. 누구나 꾸준한 ‘자기계발’을 통해 자기 삶의 기획자가 될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의 모토는, ‘스펙’과 ‘융합인재’를 종용하는 대학사회와 인문학 자체를 ‘포트폴리오’와 등치시키는 연구풍토 그리고 ‘재테크’를 통한 노후관리가 가장 유려한 삶의 기술이라 믿는 사회의 저변에서 우리 자신을 부단히 압박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푸코는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되짚어나가는 가운데 오늘날 ‘프로젝트의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한편으로는 안전-테크놀로지에 예속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반성하고 형성하는 자유로운 주체일 수 있는 한줌의 가능성을 일러준다.
  물론 우리는 푸코가 무언가를, 그야말로 단번에 해결해주리라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되돌아온 푸코’를 매만지는 사이 우리의 학문적 관심사는 어느덧 1980년대를 향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는 1980년대를 통해 현재의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푸코가 다시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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