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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산책] 번역과 정치, 혹은 번역의 새로운 정치 : 이제는 ‘일반번역학’이 필요하다
번역의 ‘정치화’와 보편성으로서의 번역
[193호] 2015년 12월 07일 (월) 이재원 번역가·중앙대학교 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

 
   
 
활판인쇄술의 발명 이래로 번역과 정치는 늘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단적으로 마르틴 루터가 그리스어로 된 1519년판 에라스무스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을 때 당대의 서구 정치는 더 이상 예전 같을 수 없게 됐다. 동아시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알렉산더 파슨스 마틴이 헨리 휘튼의 『국제법의 요소들』(1836)과 요한 블룬칠리의 『법전으로 나타낸 문명국들의 근대 국제법』(1868)을 각각 『만국공법』(1863)과 『공법회통』(1879)이라는 제목 아래 중국어로 번역하고 그 책들이 중국을 경유해 일본과 대한제국으로 유입됐을 때에도 당대의 동아시아 정치는 더 이상 예전 같을 수 없었다.
  실로 번역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화’된다. 우리가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사례는 ‘금지된’ 지식의 번역이다. 혹자가 ‘프로메테우스의 불 훔치기’에 비유한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인데, 가장 가까운 국내의 사례로는 1980~90년대의 ‘사회과학(특히 맑스주의) 서적’ 번역이 그렇다. ‘금지된’ 지식은 기존의 공인된 지식체계를 상대화하거나 뒤흔들기 마련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공인된 지식체계를 독점해 권력을 유지해온 기득권 세력을 위협한다. 넓게 보면,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도 이에 해당한다. 성경의 내용 자체야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만 해도 성경은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씌어져 있던 탓에 그 해석과 적용을 성직자-권력층이 독점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당대의 민중들에게 ‘금지된’ 지식이었다.
  번역은 원래의 맥락에서 분리될 때에도 ‘정치화’된다. 『만국공법』과 『공법회통』의 번역이 이에 해당한다. 당대 유럽 각국들 간의 조약을 정리해놓은 이 책들이 처음 소개됐을 때 중국은 이 책들에 담긴 유럽 공법을 자국의 회전(會典) 같은 성문화된 행정법규로 오해했고, 그에 따라 그것이 근거한 유럽 국제정치의 성격, 즉 팽창적 제국주의를 간과했다. 이처럼 애초의 맥락에서 분리되어 유입된 유럽 공법이 한편으로는 당시 열강들과 동아시아 각국의 국제적 불평등 관계를 고착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대한 실망이 동아시아 각국으로 하여금 사회진화론(적자생존주의)에 눈 돌리게 만들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문화의 번역’으로서의 번역

  위 사례들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번역, 즉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 정치화되는 사례일 텐데 최근에는 이런 사례가 부쩍 줄었다. 종종 ‘금서 목록’이 작성되는 촌극이 벌어지긴 하지만(우리나라의 경우 2008년에 국방부가 금지도서 목록을 작성했다) 특정한 지식에 대한 수용은 국가가 아니라 ‘사상의 자유 시장’에 맡긴다는 것이 이제는 상식이 됐다. 또한 세계화와 인터넷 덕택에 거의 무제한적으로 특정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된 오늘날에는, 문제가 되는 번역의 원래 맥락을 알기도 훨씬 쉬워졌다.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 한국어판 번역을 둘러싼 논란이 (디턴이 “불평등이란 성장의 동력임으로 인위적으로 없애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한[왜곡한]) 한경BP의 ‘판정패’로 싱겁게 끝난 것도 이 때문이다(심지어 이제는 문제가 된 번역 텍스트의 원저자에게 직접 묻고 들을 수도 있는 세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실 오늘날 더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번역은 더 넓은 의미에서의 번역이다. 이때의 번역이란 ‘언어’뿐만 아니라 그 언어가 속한 ‘문화’ 자체를 옮기는 행위에 가까운데, 특히 탈식민주의와 비판적 문화인류학, 그리고 (이것들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어온) 페미니즘과 문화연구의 작업들은 예전부터 이런 의미에서의 번역이 정치화되는 과정을 분석해왔다. 우리에게는 서구 여행자들의 인상기, 선원들의 모험기, 선교사들의 체험기, 기타 문학 작품 등을 통해 동양에 대한 서구의 왜곡과 편견이 어떤 식으로 고착화됐는지를 분석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오리엔탈리즘』을 ‘비판적’으로 발전시킨 연구들은 거의 도서관 하나를 채울 만큼 많다.
  특히 ‘문화의 번역’으로서의 번역을 성찰하는 최근 작업들은 번역의 이면에 은폐된 권력-이데올로기-헤게모니 관계들을 문제 삼는 만큼이나(『오리엔탈리즘』의 전통) 문화들 간의 수용, 타협, 전유에 주목한다. 이런 연구들이 ‘혼종성’(hybridity) 혹은 ‘횡단(성)’(trans[versality])을 핵심 개념으로 내세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령 할리우드식 미국 대중문화처럼 (해당 국가의 군사력, 경제력, 혹은 그 자체의 상징적 가치로부터 뒷받침을 받아) 특정한 문화는 다른 문화보다 우월한 지배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번역은 문화들 간의 등가 교환이 아니라 비등가-비대칭적 교환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지만 피지배 문화는 지배 문화와 끊임없이 교섭을 벌이며 스스로를 변형해가고, 그 과정 속에서 번역의 정치는 복잡해진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읽은 리디아 리우의 『언어횡단적 실천: 문학, 민족문화, 그리고 번역된 근대성-중국, 1900~1937』(1995)에서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이 책에서 리우는 ‘?’라는 신조어의 형성 과정을 추적한다. 원래 중국어에는 영어나 프랑스어의 3인칭 여성대명사(가령 she, elle)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다. 리우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이런 결핍을 중국어 자체의 ‘결함’이라 생각했고 결국 무성형 ‘他’에서 ‘人’ 변을 ‘女’ 변으로 바꾸어 ‘?’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그에 따라 ‘他’는 3인칭 남성대명사로 전환됐다). 리우는 원래 무성형 단어였던 ‘他’가 이렇듯 여성형과 남성형으로 분리됨으로써 이전에는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상징적 현실’의 차원이 중국어 속에 도입됐고, 그로써 성/젠더를 통해 (특히 남녀 사이의) 기존의 권력관계를 새로운 언어로 형상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고 설명한다. 자, 이것은 서구 문화에 의한 전통 문화의 왜곡일까, 서구 문화를 이용한 자국 문화의 갱신일까? 여기에는 실로 복잡한 ‘이중의’ 투쟁, ‘이중의’ 정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보편성’으로서의 번역

  다른 한편,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번역을 언급한 바 있다(『정치를 찾아서』, 1999). 바우만에 따르면, 번역은 이제(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차이의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는 기술이(었)다. 왜냐하면 번역이라는 행위는 나와 다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타인들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과정에 필수불가결한 행위로서, 사실상 “삶의 모든 형태에 공통된 속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우만은 이렇게까지 말한다. 우리 모두가 번역자이다. 이렇게 보면 바우만이 말하는 번역은 서로 다른 의미공동체들, 즉, 상이한 문화들이 서로를 이해하(려)는 행위이다.
  이런 바우만의 논의를 되받아 에티엔 발리바르는 번역을 “[세계화로 인해 가속화된] 다문화주의를 정치적으로 다루기 위한” 도구이자 ‘규제적 이념’이라고까지 말한다(『국경으로서의 유럽』, 2005). 특히 발리바르는 “이미 공유된 의미와 동의된 해석에 의지하지 않고도 효율적인 소통에 이를 수 있는 이 공통의 능력 속에 보편성의 가능성이 주어진다”라는 바우만의 지적에 주목한다. 요컨대 번역은 계급, 성별, 인종의 차이를 막론하고 모든 ‘종’(種)이 지닌 “소통하고 상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보편성’인 바, 서로 다른 수많은 개별성과 차이를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매개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바우만과 발리바르의 이런 주장은 (특히 미국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유럽공동체에 가져온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서 제출된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들의 주장을 우리의 맥락에 걸맞게 변형시켜 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우만은 보편성으로서의 번역을 이렇게도 설명했다. 다른 식으로 계속 말할지 모르고 또 그럴 권리를 가진 타인들에 직면해, 어떻게 계속 말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 내 생각에, 이것은 상대방이 뭐라 말하든 계속 내 말만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끊임없이 대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끝내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런 간격을 폭력적으로 은폐하거나 제거하기보다는 좁혀나가야 한다.
  최근 ‘헬조선’으로 표상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라.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서로에게 ‘이방인’(barbaros)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멀게는 세대론 논쟁, 가깝게는 메갈리아 혹은 아이유의 ‘제제’ 논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똑같은 말을 쓰고 있으면서도 서로들 상대방을 ‘자신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너무나 손쉽게 상대방에게 낙인을 찍거나 무시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발리바르는 바우만의 논의를 발전시켜 ‘일반화된 번역’을 주장했다. 더 많은 번역(전통적 방식의 번역을 반복하기)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번역(번역의 새로운 실천)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나는 이와 유사한 혹은 다른 맥락에서 ‘일반번역학’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승열패,’ ‘각자도생’의 현실에 직면한 우리에게 번역은 더 이상 상이한 언어나 문화 간의 소통이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에, 혹은 그만큼이나 오늘날의 우리에게 번역은 동일한 언어나 문화 간의 소통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일반번역학의 정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적대적 대결의 정치라기보다는 갈등적 소통의 정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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