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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산책]정치미학의 두 가지 패러다임 : 파놉티콘과 올리곱티콘
‘모든 것을 보다’의 권력과 미학
[191호] 2015년 09월 21일 (월) 홍 철 기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 <L'Historie de la musique a Montreal ou Les Arts lyriques>, 1967.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에 의해 재해석된 이래로, 18세기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 제안했던 감옥 건축 모델인 파놉티콘(Panopticon)은 특히 국가에 의한 감시와 관련하여 권력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확립되었다. 이때 파놉티콘 체제의 핵심 원리란 ‘모든 것을 본다’는 권력, 혹은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가 ‘모든 것을 듣는다’는 권력 내지는 능력을 추가한다면, 우리는 마치 파놉티콘이 단지 사회의 이상적 원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현실인 세계를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감시카메라는 이제 어디에나 설치될 수 있으며, 국가의 정보기관은 거의 모든 디지털 통신을 감청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정말로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세계가 현실이 되었다. 벤담 스스로 파놉티콘을 일종의 유토피아로 이해했다면, 우리는 그것이 더 이상 ‘그저’ 유토피아가 아닌 세계를 살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만일 파놉티콘이 이미 벤담에게서 감옥 건축 내지는 디자인의 실용적인 모델에 국한되지 않고, 유토피아의 원리, 혹은 사회의 조직 원리로 이해될 수 있었다면, 이는 단지 ‘권력’의 모델이 아니라 ‘지식’이자 ‘감각’의 모델이기도 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모든 것을 본다’(혹은 ‘듣는다’)는 말에는 이미 감각의 문제(‘보다’)가 전제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은 ‘만인을 감시한다’는, 감시 권력과 관련된 파생적 의미로 곧장 이해되기에 앞서서 ‘모든 것을 보다’라는 원래의 의미에서 우선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모든 것을 본다’는 능력, 혹은 권력이란 사실은 단지 ‘우리’를 마치 일망감시체계 내의 죄수들처럼 감시하는 간수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를 ‘보는’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패러다임일 수 있다. 모든 것을 감시하듯이 (혹은 감시한다고 생각하듯이) ‘사회’에 대한 지식과 ‘사회’에 대한 감각은 언제나 ‘모든 것’에 대한 것이라는 확신 또한 파놉티콘의 패러다임에 속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파놉티콘은 단지 일망감시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가 말하는 의미에서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이루는 하나의 체제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은 감각적인 것을 분할하고 분배하는 특정한 ‘체제’의 원리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파놉티콘과 올리곱티콘
   

   이런 의미에서,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파놉티콘에 대하여 ‘올리곱티콘(Oligopticon)’을 대비시키는 관점은 매우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
   전체, 혹은 모두의 의미를 갖는 접두사 ‘pan-’을 라투르는 소수를 의미하는 접두사 ‘olig-’으로 대체한다. ‘소수에 의한 지배’인 ‘과두제(oligarchy)’나 ‘소수에 의한 점유’인 ‘과점(oligopoly)’의 경우처럼 올리곱티콘은 ‘모든 것’이 아니라 ‘몇 가지만’을 볼 수 있는 시각, 혹은 능력을 의미한다. 파놉티콘에서 관찰자는 모든 것을 저 멀리까지 보는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한다면, 올리곱티콘은 관찰자의 근시안적이고 협소하며 어쩌면 파편화되었다고까지 할 수 있는 시각의 원리를 지칭한다. 라투르의 이러한 비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될 수 있다.
   우선 이는 우리의 ‘보고 듣는다’는 감각의 현실을 지칭한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사물(장치)을 통해서만 보고 듣는다는 사실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보고 듣는다는 것 또한 사실은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의 복잡한 매개과정 안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은 누군가가, 혹은 무엇인가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해 듣는다. 그래서 ‘보고 듣는’ 능력은 더 이상 내가 ‘무엇을 보고 듣는가’ 하는 문제로 제한될 수 없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여기서 누구(들)를 통해서, 그리고 무엇(들)을 통해서 ‘보고 듣고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우리의 지식과 감각이 결국 타인, 혹은 다른 사물을 통해서 창출되고 전달되는 표상, 혹은 재현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전달된 재현만큼이나 그 재현의 과정 자체를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실천해야 한다. ‘모든 것을 본다’는 파놉티콘의 원리는 이런 의미에서 ‘몇 가지만을 본다’는 올리곱티콘의 원리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어떤 매개자를 통해서 지식을 얻고 어떤 대상을 지각하고 감각하는데 매우 익숙해 있다. 특히 이 매개자는 ‘인격적’ 매개자라는 점에서 나는 이를 ‘감각의 인격화’라고 부르고자 한다.
   약간의 과장을 해보도록 하자. 이제 모든 지식은 누군가의 얼굴과 말을 통해서 전달되지 않으면 신뢰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른바 ‘인문학 열풍’ 현상에서 매우 중요한 측면은 인격을 통해 매개된 인문학이다. 이는 결코 ‘활자화된 인쇄물’이라는 공통의 매체를 통해 ‘읽고 토론’하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공중의 ‘공론장’의 부활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인문학 강연자’의 열풍이다. 누군가의 얼굴을 보면서 누군가의 말을 통해서 전달된 지식이 아니면 안 된다. 물론 이때 ‘누군가’는 결코 익명의 어떤 사람일 수 없다.
   영화 상영이나 음악 공연, 혹은 예술 작품의 전시 또한 더 이상 청중이나 관객이 작품을 직접 느끼고 감상하는 관계는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토크 콘서트’라는 말처럼 언제나 누군가의 얼굴과 말을 통해서 확인되지 않으면, 혹은 그러한 ‘해설’로 보충되지 않으면, 자신의 감정과 감각에 대해서도 확신이나 신뢰를 할 수 없다는 듯하다. 이는 조직이나 제도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더 이상 서류만을 통해서 ‘비인격적’ 보고는 받지 않는다. 관료제는 더 이상 카프카적이지 않다. 언젠가부터 PT 혹은 프레젠테이션이라는 퍼포먼스는 예외가 아니라 상례가 되어버렸다. 세월호 참사 당일에도 청와대가 해경 측에 현장 동영상을 끈질기게 요구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동영상이 재생된 프레젠테이션이 일어난 공간과 참사가 일어난 현장 사이의 간극은 단지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차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보고 있기 때문에 현장이 통제되고 있다는 ‘믿음’과 그렇지 않다는 ‘믿음’ 사이의 간극은 물리적인 거리만큼 엄청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혹은 아마도 바로 이러한 간극 때문에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이 모든 ‘리-프레젠테이션(re-presentation)’의 규범이 되어버린 것 같다.

   파놉티콘에서 파노라마로
   여기서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올리곱티콘의 근시안적이고 협소한 시각의 조건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파놉티콘의 전지적 관점을 견지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올리곱티콘의 상황과 관점에서 (라투르가) ‘파노라마(Panorama)’라고 부르는 대안을 취하는 것이다. 첫 번째 선택지는 전지적 관점을 견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지속적인 좌절을 논리의 전도를 통해 해소하려는 왜곡된 방식이다. ‘모든 것을 본다’는 능력, 혹은 욕망은 점점 더 ‘모든 것을 보고 있다’는 자기 확신, 혹은 더 심각한 경우에는 ‘보고 있는 것이 전부다’라는 논리의 전도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는 결국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의 전도의 최종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모든 사회적 불일치나 공적 갈등을 ‘명예훼손’의 문제로 보려는 경향은 단순히 ‘정치의 사법화’를 넘어서 ‘감각의 인격화’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격’이란 단순히 자연인이나 법인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물신과 우상과 같은 종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마치 모든 차이와 갈등은 우상숭배와 우상파괴로 비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달리 ‘파노라마’의 대안은 올리곱티콘의 근시안적이고 협소한 관점에서 ‘전체’, 혹은 ‘모든 것’의 문제를 완전히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관점들의 연쇄를 통해 그것을 구축하고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근시안적 관점의 협소함이라는 단점은 이때 장점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때 ‘전체’ 내지는 ‘모든 것’은 일종의 시나리오, 혹은 서사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는 재현의 최종 전달자 너머에서, 혹은 이러한 매개자를 우회하여 사물 자체에 도달하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사물 자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내가 마주하고 있는 전달자 이전 단계의 매개자를 소환하고 재현해야 한다. ‘감각의 인격화’가 우상숭배나 우상파괴로 비화되는 이유는 최종 매개자 뒤에 있는 그 이전 단계 매개자의 ‘불확실한 현존’을 확인하려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재현의 전달과정, 즉 모든 매개 행위는 결국 비용과 대가를 치루면서도 여전히 불확실성을 전제로 하여 관철되는 행위와 노동의 연쇄 과정이다. 물론 이때 행위와 노동의 주체는 더 이상 원자적 개인도 아니며, 자연인으로서의 인간만인 것도 아니다. 전체를 파악하는 활동이란 이제는 언제나 우리가 최종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지각하는 것의 ‘이전 단계’의 매개자의 얼굴을 보고 그 이름을 말하면서 그들, 혹은 그것들을 재현하고 가시화하는 활동을 의미할 것이다. ‘파노라마’란 바로 이러한 ‘재현의 재현’ 활동의 연쇄로 구성되는 전체적인 그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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