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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교과서의 저편, 生과 삶의 사이에서
문학공간-내 인생의 책
[190호] 2015년 06월 01일 (월) 이장욱 시인·소설가/동국대 국문·문창학부 교수
   
 

   ‘내 인생의 책’이란 무엇일까. ‘삶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책’이라는 뜻이라면 먼저 국정교과서와 만화책들을 꼽아야 한다. 농담이 아니다. 의무감에서 읽은 교과서들의 문장이 나를 형성했다는 것은 적어도 무의식의 차원에서 진실이다. 우리는 여전히 교과서라는 상징적 패러다임의 자장 안에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이 교과서적 패러다임을 변경시키고, 확장시키고, 부수고, 그 바깥으로 길을 내는 행위이다. 
   대학시절로 돌아가면, 우선 1987년에 출간된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이 떠오른다. 엥겔스가 쓴 이 책을 나는 대학 초년의 격렬한 시기에 덜컹거리는 버스 간과 부엌에 딸린 골방에서 읽었다. 내 머릿속의 ‘구조’가 바뀌는 느낌이었으니 최초의 ‘철학적 경험’이라고 할 만했다. 머릿속의 구조 변경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책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후 얼마만큼 시간이 흐른 뒤 이 책을 다시 펼쳤을 때는 그 난해하면서도 단순한 논리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완강한 이분법 때문이었을까. 또는 ‘넷을 셀 줄 모르는 변증론자’의 책이거나, 자신이 만들어내는 삼항도식의 잉여를 알지 못하는 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질문해야 할지도 모른다. ‘잉여’에 저항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라고.
   
   앨런 긴즈버그가 1956년에 낸 시집의 제목은 『Howl』 즉 ‘울부짖음’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 시사에는 모종의 문학적 펑크, 혹은 자유주의적 비트가 결핍되어 있지 않을까. 긴즈버그가 이미 50년대에 했던 히피적 ‘울부짖음’을 오늘의 한국 시인이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여전히 낯설고 자유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자체가 민망한 일이기도 하니까.
   20세기 후반의 내가 기차 안에서, 여인숙에서, 바위 위에서 읽었던 황지우의 시들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고전이 되었다. 고전이 된 아방가르드를 아방가르드의 자기모순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단지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다. 새들이 지상을 벗어나는 각도로, 겨울-나무가 봄-나무가 되는 속도로, 황지우는 울부짖는 대신에 열정적으로 어긋났다. 시적인 것과 시 아닌 것들이 황홀하게 교합되었다. 대학시절의 나에게 ‘생(生)’이라는 그의 한자어는 ‘삶’의 애잔한 구체성을 고독한 영혼의 고도에 올려놓는 마술이었다. ‘생’과 ‘삶’의 사이에서 지지고 볶는 지극한 형식이 바로 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삶’의 정확한 구체성을 선호하며, 황지우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요즘도 가끔 ‘생’이라고 혼자 발음해보는 남자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쿤데라의 소설들을 생각하면 곧바로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의 기분이 된다. 『생은 다른 곳에』의 주인공 야로밀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저 청춘의 영혼이 사회주의의 몰락과 맺는 야릇한 연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슬픔과 유머와 근친관계라는 것을 나는 쿤데라에게서 배웠다.
지금 나는 쿤데라의 에세이소설보다는 키냐르와 페소아, 제발트와 우엘벡의 에세이소설들을 읽는다. 하지만 키냐르는 어딘지 유아적이고 페소아는 단편적이며 제발트는 지루하고 우엘벡은 마초적인 느낌을 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읽는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나는 언젠가 쿤데라에게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1929년생인 쿤데라는 아직 생존해 있는 노작가이며, 『생은 다른 곳에』는 ‘삶은 다른 곳에’로 재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자본주의가 문제인 것은 그것이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스템만큼 인간의 보이는/보이지 않는 욕동에 뿌리박고 있는 시스템을 찾기는 어렵다. 자본주의와 욕망의 집요한 의존관계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관습적 비판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책들이 흥미로운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가 헤겔의 변증법을 무리하게 해석하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비판할 때, 나 같은 독자는 가라타니 고진이 표현했듯이 ‘그건 지젝의 헤겔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의 관심은 라캉의 패러다임에 대한 지젝의 해석에 이끌린다. 요컨대 욕망의 구조와 자본주의의 노골적이면서도 은밀한 관계에 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오늘날 사물들은 유사 이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왔다. 편의점의 계산기, 생수병, 구두주걱, 신문지, 휴대전화, 우유팩……. 신비를 알지 못하는 이 모든 사물들에 의해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억압해왔던 모든 종류의 신비로부터 해방되었다. 이 세속화의 과정이야말로 ‘해방’이며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제 일반화된 입장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신비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들이다. 신비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사물 자체의 허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을 때, 현대의 시인은 이 최저고도의 허무를 구원하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떻게? 열차시간표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했던 파스테르나크와 같이. 구두주걱을 들고 구원을 명상하는 욥과 같이. 벤야민의 문장들은 의미를 잃은 사물들과 구원의 기억을 잃어버린 인간들에 대한 명상이다. 
   야훼께서 가로되, “그러나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하셨다.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다. 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자로서의 작가는 이미 신의 얼굴들 속으로 흩어져 있다는 것, 그는 침묵의 소리 속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 이제 그에게 신의 목소리는 목판에 새겨진 희미한 언어로만 남아 있다는 것. ‘내 인생의 책’은 아무래도 그런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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