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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용기가 필요할 때 읽는 문장들
내 인생의 책
[189호] 2015년 03월 23일 (월) 윤이형 소설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게 같은 책을 두 번 이상 읽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근사한 책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지만 나중에 다시 읽는 일은 거의 없다. 처음으로 읽으며 감탄과 전율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완벽한 순간이 다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여운을 즐기는 쪽이 훨씬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몇 권의 책들은 다시 펼치게 된다. 주로 용기가 필요할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고 나 자신에 대해 믿음이 없을 때 그러하다.

   로버트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 하인라인의 SF를 읽으면 언제나 미쳤다고 해도 좋을 만한 낙천성과 추진력으로 무장한 나이 든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떠오른다. 절망 같은 건 사전에 없는 듯한 그의 주인공들은 독자를 절대로 내리고 싶지 않은 롤러코스터에 태우고 아드레날린을 폭주시키며 우주 멀리로 끝없이 밀어 보낸다. 그런데 유독 『여름으로 가는 문』의 주인공 댄만은 하드보일드의 주인공처럼 고독하고 우수에 젖어 있다. 댄은 친구와 약혼녀에게 동시에 배신당하고 사업 아이디어를 빼앗긴 채 회사에서 쫓겨나 30년 동안 본의 아니게 동면에 들어가는 남자다. 물론 그는 통쾌한 복수극을 펼치지만, 내가 사랑하는 문장들은 그가 절망이라는 겨울에 갇혀 있는 첫머리에 나온다. 댄의 고양이 피트는 눈과 추위를 싫어해서 겨울이 오면 그를 따라다니며 집에 있는 열한 개의 문을 차례로 열어 보이라고 귀찮게 군다. “그는 그 인간용 문 가운데 적어도 어느 하나가 여름으로 통하고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건강이 나쁘지도 않고, 나이도 서른을 넘지 않았으며, 무일푼의 가난뱅이도 물론 아니었다. 경찰에 쫓기는 몸도 아니고, 유부녀와 사귀어 그 남편으로부터 쫓기는 몸도 아니며, 집달리를 피해 도망 다니는 몸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의 가슴에는 겨울이 들어앉아, 나는 줄곧 여름으로 가는 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 구절들을 되풀이해 읽고 있으면 목울대 부근이 뜨거워지면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차오른다. 문이 열한 개나 되는데 어떻게 그중에 따스한 여름으로 가는 문 하나가 없을 수 있을까? 고양이 피트가 그것을 믿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용기가 생긴다. 이 소설의 근사한 점은 결국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정직함’과 관계가 있는 소설들이 떠오른다. 두려움은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게 하고, 그렇게 파편화되어 흐려진 자신이 다시 두려움을 낳는다. 사람들은 보통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한다. 나도 그렇다. 그럴 때 떠오르는 작가는 아니 에르노다. 그녀는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이 아니면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으며, 경험한 것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는 철칙을 세웠고, 픽션의 형식을 빌어 작가로서의 자신을 시험대에 세웠다. 『단순한 열정』은 내 마음속에 늘 생선 가시처럼 박혀 있는 소설이다. 불편하지만 자꾸만 떠오른다. 자신에게 큰 관심이 없는 한 남자를 기다리며 그의 육체와 영혼을 열망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1인칭 화자의 목소리를 들으면, ‘이 사람 노출증 아닌가’ ‘이건 감정적인 포르노그래피가 아닐까’ 하는, 나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온 수많은 목소리가 들리고, 거기에 맞서는 한 작가의 담대함이 느껴진다. 물론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이 언제나 미덕은 아니다. 특히 그 일이 자신을 넘어 타인으로 확장될 때는 복잡한 윤리의 문제가 뒤따른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자신이 경험한 사랑의 후일담을 미화해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자랑스럽게 세상에 밝히며, 그것과는 반대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사랑하고 사랑받고픈 욕망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부끄러워하는지 떠올려보면, 이 책은 그저 만용이나 노출증의 증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필립 베송의 『포기의 순간』은 세상 모두가 적대하고 낙인을 찍고 수치심을 강요하더라도 단 한 사람, 자신만은 자기 삶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소설이다. 아들을 죽게 했다는 죄목으로 복역을 끝내고 고향으로, 견고한 시선의 감옥 한가운데로 돌아온 한 지친 중년 사내가 화자인데, 사회와 관습과 도덕이 침묵이라는 형식을 통해 그에게 그 자신으로 살기를 포기할 것을 얼마나 집요하게 종용하는지 읽다 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자신에 대한 정직함이라는 구원이 없었다면 이 책은 그저 불행과 권태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소심한 내게는 언제나 이런 식의 용기가 커다란 위안을 준다.

   얼굴을 숨긴 채 활동하는 일본 작가 마이조 오타로의 『좋아 좋아 너무 좋아 정말 사랑해』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의 동명 표제작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랑은 기도다. 나는 기도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병상을 지키며 소설을 쓰고, 자신이 쓴 허구와 진실의 경계, 그리고 사랑의 본질에 대해 짐짓 가벼운 척 깊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한 남자가 주인공인 이 소설은 내가 아는 모든 사랑의 고백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하다. 이 책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과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결국 꾸준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같으며, 그 평범하나 소중한 깨달음을 내가 이 고마운 소설에서 얻었다는 사실만 덧붙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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