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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세월호 이후에 인문학을 한다는 것
[189호] 2015년 03월 23일 (월) 류보선 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문학동네』 편집위원
   
 
  △ 케테 콜비츠의 판화. <차에 치인 아이(Run Over)>, 1910.


  원래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세월호 이후에 인문학을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주어진 주제는 ‘대한민국에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였고 여기에 ‘인문학, 대학원, 그리고 정부’라는 키워드가 같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난 ‘세월호 이후’라는 말 외에 어떤 말도 떠올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세월호 1주기 즈음이었고, 여기에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 대해 말하면서 ‘세월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는 요즘 나의 무모한 고집이 힘을 보탠 탓이었을 것이다. 세월호 사건은 사건 이후 한국 사회의 모든 논의의 단 하나의 출발점이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2014년 4월 16일 발생하여 전 국민을 경악에 빠뜨린 세월호 사건은, 소설가 박민규의 말처럼,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그래서) ‘사건’이다. 처음엔 사고였다. 승객을 가득 태운 배가 바다에서 좌초한다는 건 상상하는 것만으로 오싹하기는 하나 전혀 없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사고 이후 곧 ‘승객 전원 구조’라는 기사가 떴었고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사고가 수습되리라 믿었다. 그것이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세월호는 꽤 오랫동안 물에 떠 있었고 그 주위에는 헬기와 선박들이 계속 같이 있었다. 우리는 생중계로 그것을 지켜보았고 그런 까닭에 단 한 명이라도 구조되지 않는 상황을 상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달랐다. 세월호가 엄연히 물 위에 떠 있는 데도 어느 순간부터 국가는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다/않았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의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후 세월호가 침몰하기까지의 경위와 세월호 침몰 이후의 과정이 밝혀지면서 우리는 충격 정도가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죄의식을 맛봐야 했다. 세월호 사건은 우연히 발생한 사고가 아니었다. 우리는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이미 침몰한 우리 사회를 발견해야 했고, 또한 '저비용 고효율'이라는 자본주의의 단 하나의 교리에 순종하며 산다는 것은 곧 우리 모두가 잔혹한 괴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세월호가 어처구니없게 침몰하고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제대로 된 책임자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 존중하는 제도의 발명은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희생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추모와 애도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마치 ‘욕처럼 남은 목숨’처럼 깊은 자괴감 속에서 살아가는 유가족들에 대한 공감과 위로도 행해지지 않고 있다. 세월호 사건은 발생 당시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었지만, 1년이 지난 지금은 ‘그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고도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변화는커녕 그 어떤 반성도 이루어지지 않는, 그래서 영원히 되풀이될 수 있는 사건’이 되었다. 

  세월호 사건은 굳이 자신이 괴물임을 숨기지 않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참담한 사건이겠지만, 세월호 사건은 인문학을 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더욱 참담하고 처참한 사건이다. 인문학을 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세월호 사건이란 인문학적 전통이라든가 인문학적 정신이 우리 사회 어디에도 작동하고 있지 않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로 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인간 더 나아가 모든 생명체는 그것이 어떤 존재이건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정신이 곧 인문학적 정신의 요체라면, 우리는 세월호 사건의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는 인문학적 정신이 그 어떤 역능도 행사하고 있지 못함을 뼈저리게 확인해야 했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에게 대한민국에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간단하게 도구화하는 ‘저비용 고효율 만능주의 시대’ 속에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더불어 인간의 생명마저도 아무 거리낌 없이 돈으로 환산되는 이 대한민국에 사실 인문학을 위한 자리란 거의 없다는 사실도.

  이는 오늘날 한국의 인문학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는 말로 전달하고자 했던 그 역설적인 지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는 테제는 나치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전혀 새로운 인식론적 결단을 촉구하는 선언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테제는 오히려 앞뒤 맥락의 관련 속에서 보자면 ‘절대적인 사물화’라는 유일한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현대성에 대한 아도르노의 깊은 절망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정신을 완전히 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절대적 사물화’ 앞에서 비판적 정신이 단순히 이전의 서정시를 쓰는 것과 같은 자족적 명상에 머무는 한 그것은 그 의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사물화에 포획되어 절대적 사물화를 더욱 강화시키는 역설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도르노에게는 서정시가 아니라 절대적 사물화가 미처 포획할 수 없는 새로운 형식의 예술이 중요했다. 아도르노가 평생 서정시나 리얼리즘 대신 카프카 등의 초현실주의를 적극 옹호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아도르노의 명제에 담겨 있는 교훈은 간단하고, 간단한 만큼 강렬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진정으로 인문학을 하는 것의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전과 같은 인문학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 ‘서정시를 쓰는 것’이 결과적으로 ‘야만적’인 것이 될 수 있듯이 이전의 인문학적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야만의 힘을 키우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힘을 집중해야 하는 지점은 이전과 또 다른 인식론적 지도를 그려내고 예전과 구분되는 인문학적인 행위를 발명하는 일이라는 것.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고 묻는다면, 좀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답할 능력이 아직 내겐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세월호 이후 우리의 인문학이 나아갈 길의 첫걸음을 놓을 자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바로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위하여』(정혜신·진은영 지음, 창비, 2015)가 그것이다. 세월호 이후 가장 전위적이고 진정한 인문학적 실천을 보인 이는 내겐 단연코 단원고 유가족들과 정혜신 박사이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에는 세월호 이후 단원고 유가족들과 정혜신 박사가 구축한 인식론적 지도가 있는가 하면, 정혜신 박사가 세월호 이후 행했던 이전과 구분되는 놀라운 인문학적인 실천의 과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물론 그 책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충분히 읽어내지 못한 터여서 충분한 맥락화를 여기에 덧붙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런들 어떤가, 도저히 가능해보이지 않았던 불가능의 가능성의 첫걸음이 내디뎌졌다는 것을 확인한 것을. 이제 그 지점에서부터 길을 만들어가면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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