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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산책]좌파 메시아주의 논란에 부쳐
[187호] 2014년 12월 01일 (월) 최원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 HK 연구교수
   
△ 혁명적 게발트에 대해 깊히 고민했던 발리바르는 메시아주의를 통해 해방과 시민공존의 정치를 꾀한다. 왼쪽부터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이번에 나온 『말과 활』 6호는 모든 이의 눈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센세이셔널한 글이 실렸다. 윤인로의 글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것, 억제할 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사상경찰 진태원의 팔루스를 절단하는 절차」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 센세이션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진태원의 입장이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윤인로의 글은 더욱 큰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원칙적으로 출판되어서는 안 되는 수준 이하의 글이었다고 본다.

   우선 윤인로가 가하는 진태원에 대한 비판의 중심적인 주장은, 진태원이 정당제 대의민주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며, 게발트(Gewalt, 권력 및 폭력이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를 ‘조직된 국가적/제도적 게발트’로 환원하고, ‘미조직된 인민의 기초적 게발트’를 지우거나 억압하려 들기 때문에 메시아주의를 기각한다는 것이다. 윤인로에 따르면, 그러나 진태원이 기대고 있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입장은 오히려 국가적/제도적 게발트로 환원될 수 없는 인민의 기초적 게발트의 초과적 성격을 강조하는 입장이며, 따라서 진태원의 입장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간략히 두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진태원이 정말 정당제 대의민주주의자인가? 그리고 발리바르는 정말 미조직된 인민의 기초적 게발트(메시아적 폭력)의 초과성을 옹호했나?

   첫 번째 질문에 답해보자면, 진태원은 대표 또는 대의 개념을 옹호하지만, 그렇다고 진태원이 정당제 대의민주주의 또는 의회민주주의를 옹호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이는 발리바르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대표/대의 개념을 발본적으로 재사고할 필요성을 곳곳에서 역설하지만 그것이 의회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인로는 진태원을 정당제 대의민주주의자로 낙인찍는데 그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들을 보면 논의 맥락에서 벗어난 왜곡성 인용일 뿐이다. 윤인로는 핵심적으로 다음과 같이 적는다.

   진태원에게 ‘시민성의 재발명’은 정당정치의 쇄신이라는 ‘조직적 대안’을 통해서만, 그런 정당제의 원리인 ‘대표(representation)’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익집단이나 운동과 달리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정당이야말로 사회의 계급적·계층적 차이를 완화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조직적 대안이라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역동적 민주주의론을 공통분모로 최장집과 발리바르를 근접시키는 진태원의 주된 입장이다. (『말과 활』 6호, 87쪽)

   그러나 이 부분에서 인용한 진태원의 글(따옴표 속에 있는 부분)은 진태원이 최장집과 발리바르를 근접시키는 절에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최장집의 주장을 요약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일 뿐이다. 최장집의 주장이 이런 것이라고 설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발리바르의 주장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진태원 자신이 정당제 대의민주주의자를 자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진태원은 같은 글의 뒷부분에서 최장집의 정당 민주주의론을 명확히 비판한다. 진태원은 이렇게 쓴다.

   따라서 최장집이 말하는 운동의 긍정성은, 운동이 정당으로 포섭되는 것을 전제한다고 볼 수 있다 ... 따라서 최장집의 주장은 순환 논증이거나 운동을 포섭하려는 책략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발리바르 역시 민주주의에서 대의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최장집의 주장과 통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그와 달리 운동에 대해 본질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보자. 발리바르의 입장은 정말 윤인로의 말처럼 조직된 국가적/제도적 게발트를 넘어서는, 미조직된 인민의 기초적 게발트(메시아적 폭력)의 초과적 성격을 강조하는 입장인가?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도 윤인로는 발리바르의 논의에 대해서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을 뿐이다. 발리바르의 논문 「게발트」를 검토하면서 윤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하되 발리바르는 엥겔스의 게발트론이 ‘조직된 국가게발트’와 ‘미조직된 인민의 기초적 게발트’라는 서열적 구도 속에서 작성된 것임을, 미조직된 게발트가 조직된 게발트의 지도·견인·매개·대표의 대상으로 안배되고 배분되어 있는 위계적 상태를 부당 전제한 것임을 비판했다. 바로 묻자. 조직된 게발트를 권좌에 올리던 그때의 엥겔스는 누구인가. ‘조직적 정당’을 말하는 오늘의 진태원이다. (『말과 활』 6호, 88~89쪽)

   다시 말해서, 윤인로에 따르면, 조직/제도만 강조하는 진태원은 과거 엥겔스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으며, 엥겔스의 오류란 바로 조직된 국가게발트에 미조직된 인민의 게발트(메시아적 성격을 갖는)를 종속시킨 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윤인로에 따르면, 발리바르는 이러한 엥겔스의 오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니, 발리바르를 쫓아가는 척하는 진태원은 사실상 발리바르를 왜곡하거나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리바르의 해당 글(이 글은 진태원이 편역한 『폭력과 시민다움』(난장, 2012)에 실려 있다)을 읽어보면 발리바르의 비판은 그런 식의 비판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심지어는 반대로까지 읽힐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엥겔스에 대한 발리바르의 비판의 핵심은 엥겔스가 게발트에 대한 맑스의 사고에서 복잡성을 지우고, 인민의 혁명적 게발트가 혁명 이후 합리성(사회주의국가를 조직하는 제도적 합리성)으로 긍정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본주의(와 그 안에 있는 폭력)의 역사적 발전전망에 대한 메시아적 단순도식으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리바르에 따르면, 맑스가 아닌 엥겔스야말로 오히려 메시아주의적인 방식으로 사고했으며, 바로 그랬기 때문에 엥겔스는 오히려 ‘혁명적 게발트야말로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 있는 모든 낡은 사회에서 산파역할을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발리바르는, 엥겔스가 메시아주의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메시아에 여성의 성(산파)을 준 최초의 인물이라고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폭력과 시민다움』, 35~36쪽)

   그런데 윤인로는 엉뚱하게도 이러한 ‘산파’ 정식이 엥겔스의 것이 아닌 맑스의 것이었다고 왜곡하고, 맑스는 이러한 정식을 내세울 만큼 명백한 메시아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윤인로는, 발리바르가 엥겔스를 비판한 것은 엥겔스가 메시아주의를 기각하고 일체의 게발트를 국가/제도적 게발트로 환원한 점에 대한 것이었다고 목청을 높인다(『말과 활』 6호, 94쪽). 하지만 발리바르는,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과잉착취’에 대한 맑스의 논의를 엥겔스가 단순화시켰다고 비판하면서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과잉착취에 대한 [맑스의] 이런 분석은 폭력과 제도의 상호작용, 저항, 갈등의 변증법에 이른다. 앞서 봤듯이 이 변증법에서 두 개의 본질적 계기를 인용하고 있는데도 엥겔스가 과잉착취에 관해서는 이 변증법의 복잡성을 단순화하고 있다는 것은 놀랍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궁극적으로 이 변증법의 복잡성이 일의적인 역사적 의미방향이 아니라 맑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계승자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다수의 가능한 발전방향들로 향하기 때문인 듯하다. 『폭력과 시민다움』, 46쪽

   다시 말해서 게발트의 복잡성 때문에, 메시아적 종말론의 전망(혁명적 폭력을 통한 새로운 사회 건설)이 불투명해지고, 자본주의가 나아갈 수 있을만한 가능한 길이 다수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의 길, 식민지 개척을 통한 게발트[폭력]의 해외이전 또는 수출을 통한 본국의 착취 완화의 길, 실질적 포섭을 통한 노동자 계급의 보수화의 길 등이 그것이다. 이 다양한 역사발전의 방향을 인정하게 되면 맑스주의가 주장해온 혁명주의(또는 메시아적 종말론)가 위협받기 때문에 엥겔스가 그 복잡성을 지우려고 했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주장이다.

   발리바르는 맑스가 『자본 I』에서 이 모든 가능성들을 가지고 씨름했기 때문에 그 책의 2판을 찍으면서도 여전히 그 저서를 미완성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는 혁명이 제도화/국가화 되더라도 제도로 환원될 수 없는 봉기적 폭력의 차원이 여전히 남아 있게 되며 긴장을 형성한다는 정도의 말이 아니다.

   발리바르는 메시아주의를 기각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 공산주의에 메시아주의적 차원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정한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그러한 메시아주의를 (데리다적 의미에서) 탈구축(해체)하려고 시도한다. 그가 봉기적 해방의 정치와 시민공존(civilite)의 정치를 결합함으로써 혁명을 “문명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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