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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도착하지 않은 레이먼드 카버의 산문을 기다리며
Carver, Raymond & the others, Raymond Carver : Collected Stories, Library of America, 2009.
[184호] 2014년 06월 09일 (월) 이종찬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문학의 영역에서 논픽션, 즉 일기나 서한, 수필 등과 같은 에세이 장르의 글을 경시하는 태도가 실제 현실에 부과하는 모종의 이데올로기적 효과의 폐해는 심각해 보인다. 글쓰기의 문제가 우리의 실제 삶과 근본적으로 유리된 차원에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문학’(文學, 동시에 언제나 聞學)의 엔터테인먼트화. 언제부턴가 문학이 우리의 생(生)을 서술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 초라한 현실은 우리가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聞)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타인에게 반응(respond)하는 능력(책임; responsibility)을 상실하고야 말았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증명할 것이 없다.

  레이먼드 카버가 장편을 쓰지 않은 혹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결코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답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어떠한 형태의 고상한 미학적 차원의 이유를 들이대지 않는다. “당장 보수를 지급받을 수 있는 것을 써야 했습니다. 그래서 단편이나 시를 썼지요.” 단적으로 그는 ‘단편이 나의 운명입니다, 내가 단편을 택한 것이 아니라 단편이 나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따위의 거창한 말들을 늘어놓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는 ‘변명’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는 천상 유물론자다. 루이 알튀세르던가. “유물론의 핵심은 간단하다. 자기변명을 늘어놓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한 이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인생의 어떤 것보다도 술을 끊은 게 더 자랑스럽습니다.”와 같은 레이먼드 카버의 문장 역시 소박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 좋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남는 사건을 들려달라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무언가 자신이 이룬 작가적 성취와 관련한 자의식적 코멘트가 나오리라 기대했던 독자들을 보기 좋게 배반하는 것이다. 자신의 글쓰기에 영향을 미친 이가 누구인지에 대해 술회하는 대목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경제적인’ 문체는 자주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한 그것과 견주어 논의되곤 한다. 헤밍웨이는 카버가 존경했던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그(헤밍웨이)의 글이 저에게 영향을 끼쳤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카버의 이 답변이 알량한 작가적 자존감에서 비롯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앞서 말했지만 어떠한 형태의 변명도 카버의 것이 아니다. 대신 그는 자신이 대면했던 “진짜 영향력”(real influence)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달(moon)과 조수(tide)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뜨고 지는 달 그리고 밀물과 썰물의 조수 간만. 간단히 말해 자기 앞에 놓인 생의 비가역적 시간성(순간성).

  카버는 글쓰기의 끝에 남는 저자의 숭고한 초상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이같은 태도는 근대 이후에서야 일반화된 글쓰기의 낭만주의적 신화에 불과하다. 차라리 글쓰기의 한계 지점에서 저자 따위는 사라진다고 카버는 믿었을 것이다. 또한 글쓰기의 그 ‘바깥’(dehors) 지점에서 사라지는 것은 저자만이 아니다. 그가 쓴 말(語)들까지도 가뭇없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을까. 말들의 효과만이 잔향처럼, 효과처럼 남는다. 한 곡의 음악처럼 그리고 장미 한 송이의 향기처럼.

  카버는 아이작 디네센(Isak Dinesen)이라는 작가를 좋아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녀(아이작 디네센)는 매일매일 희망도 절망도 없이 조금씩 쓴다고 말했습니다.” 카버가 살아있었다면 그 역시 그러했으리라.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의 태도로 묵묵히 그 역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썼을 것이다. “소설을 쓰려면 벽이 필요해요.”라고 말한 소설가 백가흠의 문장 앞에서 한동안 멍해진 적이 있다. 작가는 벽을 통해 세상을 본다고도 했다. 빈궁한 일용직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오랫동안 변변치 않은 집필 환경에서 쪽글을 써내야 했던 카버의 모습이 겹쳐진다.

  아마도 ‘작가’(作家)는 두 가지 부류로 판별될 것이다. 벽을 통해 벽 너머의 타자(他者)를 감각하는 자와 벽을 넘어서지 못한 채 발을 동동거리며 안타깝게 주변을 서성이는 자.(그러나 자기 앞에 놓인 ‘벽’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들은 우리 주위에 또 얼마나 허다한가) 두 경우 모두 놓여있는 물리적 위치는 ‘벽 이쪽’으로 같지만 존재론적으로 두 작가는 전혀 같지 않다. 물론 카버는 전자였다. 우리가 카버를 사랑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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