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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지만 상기해야 하는 죽음의 역설”
『서양문학에 나타난 죽음』의 저자 황훈성 교수를 만나다
[184호] 2014년 06월 09일 (월) 서창훈 편집위원

   
 
△ <죽음의 무도>의 한 장면 - 미카엘 볼게무트. 1493.
  ‘잔인한 4월’과 애통과 절망, 분노의 5월을 보냈다. 이제 어떤 6월이 기다리는가? T.S. 엘리엇이 행위의 가치들이 소멸되고 번식과 번성이 단절된 황무지를 바라보며 읊었던 이 시구를 우리는 황무지보다 불모이고 사막의 모래바람보다 탁하며 칠흑보다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며 되뇌어야 했다. 만물이 피어나는 봄에 맞닥뜨린 이 거대한, 갑작스런 죽음과 이 진행형의 죽음을 속절없이 바라만 봐야 했던 ‘나’들. 영화와 티브이 속에서 피 튀기는 죽음들을 무덤덤할 만큼 보아왔건만 1센티미터 두께의 철판 너머에서 진행되었던 실존적 죽음은 까무러칠 만큼 잔인했다.

  어렴풋이 정신이 들면서 죽음에 대한, ‘어떤’ 죽음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의문들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덩어리가 되어 사고의 수면 위로 끊임없이 떠오른다. 그 어디에서도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해 땅 속 깊숙이 파묻어버린 방사능 폐기물처럼 살아서는 열어보지 않을 것처럼 켜켜이 자물쇠를 채워 의식 바깥에 내다버렸던 죽음의 문제들.

  어디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죽음(서양문학에 나타난)』(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을 손에 들고 죽음에 관해 설파하는 학자는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 다름 아닌 영어영문학부 황훈성 교수다. 이 책은 6년의 시간을 잡아먹고 세상에 나왔다. 오백 페이지가 넘어 양도 방대하지만 중세와 근현대의 문학작품들을 골간으로 고대 그리스 철학, 종교, 사회학, 심리학, 진화생물학과 뇌신경학에 이르기까지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호인문학상을 수상해 이미 학문적인 검증도 거쳤다. 대낮과 죽음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어스름한 시각 황 교수를 방문했다. 기대와 달리 이 ‘죽음학자’는 가장 어두운 테마라 여겨왔던 죽음을 그 어떤 학자보다 밝은 표정으로, 열정적으로 토로했다.

  커피 한 모금을 채 삼키기 전에 죽음의 변화된 양상에 대한 강의가 시작됐다. “서구에서 죽음에 대한 인식은 찰스 다윈을 기점으로 급격히 달라집니다. 19세기만 해도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합리주의와 영혼불멸이 지배적이었죠. 아리에가 ‘달콤한 죽음’이라 표현했듯 육신을 혐오하고 죽음을 행복한 사건으로서 받아드렸습니다. 하지만 진화생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한편으로는 사유와 축적, 시장, 소비,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확대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물론과 철인지배에 기반을 둔 공산주의가 구축되면서 영혼불멸과 내세는 철저히 의심받기 시작했습니다. 영혼필멸로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가 확산된 건 당연한 귀결이겠지요.”
 
 
 
   
  이 죽음의 공포, ‘티모르 모르티스’(tim-or mortis)를 극복하기 위해 현대인들은 죽음에 관한 에피쿠로스의 금언을 교묘하게 헤도니즘적으로 전용한다. 에피쿠로스의 명제는 가장 끔찍한 악인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 죽음은 현존하지 않았고 죽음이 현존했을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 자에게든 죽은 자에게든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에피쿠로스는 그러므로 청안한, 안빈낙도의 삶을 구하라고 가르치지만 영악한 현대인들은 이 결말을 카르페디엠과 바꿔치기해 초로와 같은 삶을 마음껏 즐기라고 외친다. 쾌락 속에서도 스멀거리는 두려움을 마저 떨치려고 사전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지우고 대신 금기어 목록에 올리며 인생이란 플롯 구조의 대단원도 없애버린다. 죽음을 망각한 이 군상을 바라보는 황 교수의 심정은 안타깝다. “현대인들은 죽음에 대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금수와 다를 바 없이 자기 삶의 극적 구성에 소홀하지요. 무지의 공포가 의도적 망각이라는 퇴행현상을 불러왔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 같은 부정이나 거부로부터 말미암은 졸린 마비 증세로부터 인간을 각성시키고 회피가 아닌 대응을 통해 죽음이 야기하는 공포의 타당성을 이해하고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곧 죽음학의 목표이기도 하지요.”

  죽음을 망각한 현대의 죽음은 과거보다 훨씬 그로테스크하다. 일단 죽음은 “외설적인” 것이 되어 과거의 섹스처럼 공공장소에서 입에 올릴 수 없게 되었고 “추악한 죽음”이란 부적을 붙인 채 현실 밖의 결계로 추방당했다. “죽음 자체를 포르노그라피처럼 회피하며 타기하는 현대인의 보편적인 심리 저변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 티모르 모르티스가 숨어 있습니다. 엄존하는 죽음 앞에서 눈을 감고, 모두들 자신들이 맞을 죽음은 그들이 목도한 이웃의 험상궂은 죽음과는 다를 것이며 보다 품위 있고 공손할 것이라고 막연히 믿으면서 현재의 삶에 몰입합니다. 그럴수록 죽음은 갑작스러울 따름입니다. 이 느닷없음이 현대 죽음의 가장 큰 특징이죠. 미국의 9.11, 일본의 3.11, 최근 우리의 4.16을 생각해 보세요. 재난적 죽음, 대형 참사, 비명횡사는 이 시대 가장 흔한 죽음의 형태가 되었고 문명의 이기는 늘 대량살상무기가 될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최소한 죽음과 관련하여 벡과 기든스의 위험사회는 뛰어난 설명을 제공했고 베버의 예측가능성과 계산가능성은 고도로 합리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순되게도 그 과녁을 비껴가고 말았다.

   
 
   
 
  현대 죽음의 그로테스크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 큰 비극, 황 교수로 하여금 죽음에 관해 관심을 갖게 만든 슬픔은 죽음에 죽어있는,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불명료한 의식 속에서 임종을 맞는 대부분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홀바인이나 콤브가 그린 『죽음의 무도』에서는 죽음사자가 개별주체의 신앙적 도덕적 흠결을 겨냥하여 화살을 쏘았고 과녁이 된 당사자들은 각성과 참회의 순간을 짧으나마 체험했죠. 그들에겐 올바른 신앙과 윤리의 원점이 항상 존재했고 자신들이 다만 그 원점에서 너무 벗어나 살았다는 반성적 인식이 가능했습니다. 현대인의 죽음은 어떤가요? 자신을 욕망과 물질적 소비의 기계로 환원시킨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광적으로 소비합니다. 남의 것을 탐하여 자신을 타자로 변신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하지요. 모두들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 자신이 받고 있는 형벌이 어떤 종류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떳떳해합니다. 코키스의 『죽음의 무도』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자신들이 집 나가서 자기 집을 잃어버렸는지조차도 모르는 절대 치매환자들과 같죠. 절대 치매환자들은 나름대로 유쾌하며 때로는 당당하기도 하죠. 무지와 맹목적 추구의 지옥, 바로 21세기 현실을 살다가 자신이 어떤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른 채 눈을 감는 죽음. 우리 시대에는 원점이 없다는 것, 임종 때조차 원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죽음보다 더 큰 슬픔이지요.”

  왜 이 음습하고 찐득찐득한, “타기”하고 싶은 죽음을 떠올려야 할까. 잘 보기 위해서는 가끔 눈을 깜빡여야 하듯 삶을 잘 꾸려가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동안 항상 죽음이 내 곁에 바싹 다가와 있음을 명심해야한다. 황 교수는 이 ‘메멘토 모리’, 죽음의 상기가 죽음학의 핵심이라 전한다. “장구한 인류 역사에서 죽음은 항상 인간의 과도한 탐욕에 대한 해독제 내지는 정화제 역할을 해 왔는데 우리는 죽음을 뒷방에 가두어 놓고 우리의 현재적 삶만 탐닉하고 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온갖 튜브줄에 포승당하여 마치 <죽음의 무도>에 나오는 죽음해골이 빙의한 듯 모골이 송연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날 때 비로소 죽음을 일별하게 된다면 더 두렵지 않을까요? 죽음의 상기는 삶의 처신을 잘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계기를 통해 인생의 낭비를 막고 죽음 또한 슬기롭게 준비하고 맞이하게 될 수 있겠지요. 이것이 곧 ‘죽음의 기술’ 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입니다.” 슬기롭게 죽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바른 삶을 영위하는 기술, 곧 아르스 비벤디(Ars Vivendi)를 깨우쳐 주는 데에 메멘토 모리의 참 가치가 있다.

  『죽음』을 읽다보면 세월호 침몰을 이 책의 한 장, 아니면 어느 장의 사례로 읽었던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현대 죽음의 비극적 파국에 관한 책의 묘사들이 이 참사를 갖가지로 예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황 교수는 몇 가지 이야기를 덧댄다.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적 성격과 유지방식으로 인해 인간이 수동적이 되면 늘 비극적인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세월호 침몰 역시 도구적 이성만을 강조한 자본주의가 빚어낸 필연적 결과지요. 대규모 추모공원이 건립되어 우리 사회의 메멘토 모리로 삼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해법은 인문학의 부활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현재 교육 시스템은 인문학적 소양을 키워주지 못하고 의미파악과 가치판단도 미숙한 쾌락지향적 공리주의자만을 양산할 따름입니다. 이들이 지배적인 이익과 이윤의 사회에서는 미디어가 악용되고 민주주의 제도마저 무의미해지는데 죽음의 상기는 너무 큰 바람일 수도 있겠군요.”

  모든 현존재는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이며 그 길은 본인 외에 어떠한 동반자도 허용되지 않는 절대 고독의 길이다. 죽음학자 황훈성 교수에게 죽음은 추악한 것도, 터부시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그는 죽음이 우리의 일부임을 상기시켜준다. 우리 곁에 바투 선 죽음, 불현 듯 손을 내밀 죽음, 이 죽음에 대해 던진 톨스토이의 물음은 필멸의 인간 누구나 떠올려 보아야 할 화두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어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이 죽음도 결코 파괴할 수 없는 그런 의미를 내 삶 속에서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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