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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철학과 찰스 테일러
찰스 테일러, 『헤겔』, 그린비, 2014.
[183호] 2014년 05월 12일 (월)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
  일용직 노동자나 박봉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에게 생명을 바쳐 회사를 살리기를 요구할 때, 그렇게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공동체는 개인의 생명과 욕망과 자유를 실현하는 도구인가? 아니면 개인이 공동체의 도구인가? 어리석고 부적절한 질문을 던진 것 같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이런 생각과 질문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어찌됐든 공동체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실현하고 확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매체이면서, 우리네 삶의 주체이기도 하다.
  개인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는 자유주의자, 사회계약론자에게 공동체와 국가의 인륜성을 강조하고 그것에 동화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때론 폭력처럼 보인다. 타인의 고통과 빈곤과 부조리를 돌아보면서 책임감을 느끼라는 공동체적 발상은 ‘능력에 따른 자유 경쟁’과 그에 따르는 ‘분배 정의’를 해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간극을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까?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보편화된 나라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실천적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은 헤겔 철학을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게 된다. 공동체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면서도 개인주의를 살려내고, 구체적 삶에 자연스럽게 적용하여 사회과학적 이론을 만드는 헤겔 전문가가 찰스 테일러이다.
  헤겔 철학이 삶과 연결된 엄청난 보고라는 점을 형이상학 체계와 연결하여 설명하기 위해, 테일러는 주요 분야와 주제들을 다 다루고 있다. 이때 무엇보다도 테일러의 강점은 헤겔에 대한 오해와 이해가 무엇인지를 동시에, 다각도로, 아주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전문가적 깊이를 견지하면서 진행되는 설명은 전문가와 대중이 같이 책을 읽는 호사를 누리게 해준다.
  헤겔은 자유주의나 개인주의를 무시하는 공동체주의로 오인을 받아 왔는데, 테일러는 현대 사회의 상황에 비추어서 이것을 불식시킨다. 책이 방대하기 때문에, ‘제4부 역사와 정치’에 들어있는 내용을 예로 들어 보자.
  테일러는 헤겔 『법철학』의 시민사회를 설명할 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행동이 동시에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점을 설명한다. 이것을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와 연결한다. 게다가 아담 스미스의 욕구 이론을 도입하여 정당성을 강화하고, 이성의 간지를 통해 논의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테일러는 헤겔 전문가로만 끝나지 않는다. 당면한 현실 문제에 적용하여 실천적 방법도 모색한다. 철학자들은 대체로 ‘동종화’를 기반으로 삼으며 헤겔도 그렇게 간주되었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오히려 헤겔이 ‘동종화’를 비판하면서 ‘보수주의’로 전락하지 않는 면을 부각시킨다. 동종화에 대한 헤겔의 거부는 ‘차이와 동일성’을 동시에 견지하며, 테일러는 차이를 인정하는 다문화주의 논의에서 공동체주의적 다문화주의를 구축하는 실천적 결과를 낳는다.
  헤겔 연구서는 2차 문헌도 어려워서 오히려 이해를 가로막는 경우도 흔하다. 그에 반해 깊이 있는 내용을 가독성 있게 풀어내면서 삶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된 영어권 연구서로 오랫동안 회자되던 책이 테일러의 『헤겔』이다. 전문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 연구자도 이해하기 쉽도록 현실적 조망을 지녔기 때문에, 이 책은 오래 전에 번역이 되었어야 했다. 일찍 번역되었다면, 헤겔 연구의 질을 한층 더 올려주었을 것이다. 이제라도 번역서가 나온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겠다. 번역자인 정대성 선생님은 독일 관념론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정치 철학에서도 모범을 보여주었고, 신학과 종교 부분에도 탁월한 식견을 지녔는데, 테일러 책을 번역하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다시 한 번 식견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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