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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라는 전쟁터
[182호] 2014년 04월 14일 (월)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 영화 <28일 후>(대니 보일 감독, 2002)의 한 장면.
   좀비, 혹은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날뛰는 인간들.”
   
 
  우리 시대에는 그동안 주변부에만 머물러 있던 ‘감정’의 영역이 삶과 담론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변화는 사실 19세기의 문을 닫으며 20세기를 열었던 프로이트에서부터 시작한다. 프로이트 이론이 현대문화 분석에 끼친 두 가지 중대한 영향은 ‘개인 심리’와 ‘일상’이 더 이상 평범한 것, 그래서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데 있다. 의식되지 않는 것(무의식),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말실수), 진부한 가족의 역사(유년시절의 경험), 억압되었던 욕망(성) 등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담은 것이 되었다. 불안, 공포, 낯설면서 낯익은 느낌(the uncanny) 등 온갖 종류의 감정이 개인을, 나아가 인류 문명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잣대로 변했다. 프로이트를 거치며 현대인은 드디어 자신의 마음과 감정에 집중하는 인간, 곧 필립 리프가 말하는 바, ‘심리적 인간’(psychological man)이 된 것이다.

  심리적 인간이란 역사나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직 ‘자신’, 자신의 욕망을 꾸준히 따르는 것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원하는 것, 혐오하는 것, 상처받는 것을 세심하게 구분하면서, 그 때 그 때 나의 감정을 보살피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는 심리적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치료 문화’(therapeutic culture)가 일상화된다. 여기저기서 ‘심리 상담’이 판을 치며, 지식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심리학자’가 되길 요구받는다. 힘든 내 감정을 치유해달라고 애원하는 이들로 가득 찬 이 곳에서 ‘멘토’를 자처하며 ‘힐링’을 해주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상담’해주는 심리학자형 지식인이 넘쳐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들의 소통 역시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방식으로 규정된다. 우리 시대 소통의 상징인 페이스북이 ‘좋아요’라는 버튼만을 구비해놓은 이유는 그것이 다른 ‘친구’들에게 감정적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이고, 트위터가 ‘팔로우’한 사람만 공개하고 ‘언팔’한 사람을 공개하지 않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최근 캘리포니아대학 산타 바바라 캠퍼스의 학생회는 강의에서 다루는 책이나 영화가 학생의 심리적 트라우마를 촉발시킬 수 있을 때 교수가 학생에게 이를 사전에 공지해야 한다는 소위 ‘촉발 경고안’(trigger warnings)을 의결했다(<로스앤젤레스 타임스> 2014년 3월 31일자). 강도는 다르지만, 개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리버럴함의 상징이 된 이런 미국 대학의 분위기와 교수가 학생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그래서 혹시 강의평가를 망친다거나, ‘고발’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한국 대학의 분위기는 유사해 보인다.

  감정을 치유해주려는 문화, 감정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 과도하게 이루어지는 문화, 그래서 심지어 사물과 상품에게까지 높임말을 쓰곤 하는 문화가 드러내는 사실은 오늘날 사람들이 엄청난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불안과 공포의 큰 부분은 우리 시대 자본주의의 구조와 관련 있다. 『감정 자본주의』에서 에바 일루즈가 분석하는 것처럼 자본주의가 20세기를 경유하며 ‘경영’(management)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였을 때부터 이미 감정은 자본이 (심리학자를 고용해) 경영하고 관리하는 대상으로 탈바꿈했다. 한 편으로는 작업장과 사무실에서 생기는 심리적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조절함으로써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심리적 자조(self-help)의 이데올로기가 번성했다. 삶의 모든 영역이 자본에 포섭되었을 뿐 아니라 직업의 불안정성이 만성화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에 감정은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 알베르토 토스카노, 『광신』
   
 
비포 베라르디가 『미래 이후』에서 말하듯, 노동이 삶과 겹침으로써 어떤 시간에도 ‘자기계발’에 힘쓰지 않을 수 없고, 과도한 정보처리를 통한 신경자극에 노출되어 인지능력을 쉴새없이 사용할 때, 사람들의 신경체계는 망가지기 시작한다. 지난 30년 사이에 전 세계적으로 조울증이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 신자유주의적 경쟁과 노동의 강도가 극단적인 한국에서 자살이 급증하는 현상 등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호황과 불황이라는 부침(浮沈)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처럼, 오늘날 사람들 역시 감정의 부침(조울증)에 시달리는 중이다. 도태되거나 낙오되는 순간 다시 일어서기가 힘든 사회, 곧 생의 불안과 공포가 만성적인 곳에서 성공으로 인한 환희(조증)와 실패로 인한 비탄(울증)은 엄청난 속도로 반복된다.

  정치도 이데올로기도 종교도 이미 그 힘을 잃어버린 심리적 인간의 사회에서 취약해진 감정상태에 울고 웃는 사람들은, 다시, 환상적이나마 심리적 힘을 주는 상담과 치유의 향연에 빠져들게 된다. 언론, 지식, 출판, 의료, 연예를 망라하는 ‘치료 문화’는 이렇게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거대 문화산업이 된다. 더 좋은 면을 보게끔, 더 만족감을 주게끔, 더 자신을 믿게끔 만들어주는 방식, 즉 과도한 긍정성을 주입하는 방식을 통해 치료 문화는 몸집을 불리는데, 그렇게 불어난 몸집과 사회의 실질적 변화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게 오늘날 치료 문화의 ‘유일’한 단점이다. 체제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킬 뿐 아니라, 스스로 이 영역에 뛰어들어 이익을 챙기기도 하는 자본이 치료문화를 반기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의 문제’가 ‘심리적 문제’로 치환되는 곳, 전통적 의미의 ‘사회’ 자체가 붕괴된 채로 그 어떠한 유의미한 변화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는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감정 자체도 위험해진다. 사회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풀 수 없을 때, 사회의 모순은 개인들 간의 감정싸움이라는 형태로 전이된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외치는 반대편에서 끔찍한 혐오와 증오의 감정을 자극하는 일들 역시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이다. 나의 감정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의 감정을 무시하는 보통사람들의 일상과 강자의 편에 서서 사회적 약자에게 온갖 혐오를 뒤집어씌우는 ‘일베’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다.

  그런 점에서, 감정의 보호와 감정의 무시가 동시다발적으로 급증하는 이 놀라운 역설의 시대가 파국의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것은 자연스럽다.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28일 후>는 이러한 시대의 도래를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예고하고 있다. <28일 후>는 치료 문화 시대를 반영하는 장치들로 가득하다. 케임브리지의 동물 실험실, 병원, 바이러스, 감염의 모티프들이 과거 좀비장르에 여전히 남아있던 신비주의적 분위기를 대체했다. 이제 좀비는 깨어난 시체들이 아니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날뛰는 인간으로 변했는데, 모든 인간들을 미치게 만드는 이 치명적 바이러스는 바로 ‘분노’(rage)라는 이름의 감정 바이러스인 것이다. <28일 후>는 부드러운 심리적 치료 문화가 그 이면의 혐오와 증오에 의해 잡아먹히는 상황, 곧 완벽히 병리적인(pathological) 세상을 상상하고 있다.

  <28일 후>가 그려내는 ‘분노’의 묵시록은 ‘혁명’과 같은 이미 낡아버린 계몽주의적 언어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징후로도 읽힌다. 최근 토스카노는 저주받은 개념인 광신(fanaticism)을 재발굴함으로써 광신이나 열정 같은 강력한 분노의 감정이 새로운 정치를 끌어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알베르토 토스카노, 『광신』, 후마니타스, 2013). 대담한 정치적 상상력이라는 미덕을 논외로 할 때, 과연 과거의 혁명을 추동했던 분노의 감정이 오늘날 다시 발생할 수 있을까에 관해서는 긍정적이기가 쉽지 않다. 체제의 모순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이념을 비타협적으로 밀어붙이는 광신의 감정이 집단적으로 결합될 때 혁명이 가능해진다면, 우리 시대의 분노와 광신은 모조리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잘게 쪼개져 일부는 자본의 관리로 넘어가 이윤창출에 최적화된 형태로 차출되고(감정노동), 일부는 개인의 소유물이 되어 상처받은 자신을 다독이고 치유하는 데 사용되며(치료문화), 일부는 타인에 대한 아슬아슬한 배설로 빠져 나간다(혐오문화). 감정이 가진 강력한 ‘감염성’을 감안할 때, 미래의 정치적 투쟁은 더욱 더 감정의 활용에 관한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어질 것이다. 이 감염성을 개인에 묶어두려는 쪽과 사회로 확장하려는 쪽 사이의 투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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