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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간] 진짜 사나이들의 멋진 모험
허먼 멜빌, 김석희 옮김, 『모비 딕』, 작가정신, 2010
[181호] 2013년 11월 18일 (월) 김성중 소설가
 
   
 
   
 
이 책을 중간쯤 읽고 났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손에는 아직 읽지 않은 절반의 모비 딕이 남아있다’ 그러자 엄청난 행복이 밀려왔고 마저 읽어 버리는 게 두려워졌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 해 두자”라는 유명한 첫 문장으로 모험을 시작하자. 우선 ‘물보라 여인숙’이 당신을 반길 것이다. 기나긴 항해를 마치고 지금 막 도착한 선원들이 목구멍에 술을 콸콸 쏟아 붓는 그런 곳이다. 포경선을 타기 위해 이 도시에 온 이슈메일은 운이 없었다. 그날 밤 여인숙에 남아있는 잠자리라곤 작살잡이가 차지한 침대 반쪽뿐이니 말이다. 헌데 이 작살잡이가 물건이다. 기름 바른 해골을 팔러 다니는 식인종이자 온 몸에는 문신이 있는 대추장의 아들 퀴퀘그는 요컨대 야만인이다. 질색 하던 이슈메일이 그와 친구가 되는 데는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그들은 함께 배를 타기로 의기투합한다. 이슈메일은 서슴없이 말한다. “포경선은 나의 예일 대학이며 하버드 대학이다”라고. 과연 그렇다. 그는 멋진 사나이들과 굉장한 모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유명한 에이해브 선장은 이야기가 한참 진행되도록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흰 고래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와 동료들을 잃고 복수심에 그 뒤를 쫓는 선장은 줄곧 선실에만 처박혀 있다. 그의 등장은 세 명의 항해사가 소개된 후에야 이루어진다. 우선 일등항해사 스타벅, 근육이 두 번 구운 비스킷처럼 단단한 사나이.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 아닌가? 그렇다. 커피 체인점인 스타벅스는 그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현대인들이 커피를 홀짝이며 소곤거리는 장소와 작살을 들고 대양을 누비는 일등 항해사의 공간은 심하게 동떨어져 있지만, 어쨌든 스타벅스의 창업주가 『모비 딕』의 열렬한 독자였던 탓에 이런 아이러니가 형성된 것이다.
  다음은 파이프 담배를 온종일 물고 있는 낙천적인 이등항해사 스터브. 그에게 담배가 없는 건 얼굴에 코가 없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고래를 쫓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여유롭게 주변의 공기를 담배로 ‘소독’하는 스터브는 대단한 미식가이기도 하다.  
  삼등항해사 플래스크가 등장하고 항해사들의 조수까지 소개를 마치면 드디어 위대한 에이해브가 목발을 짚고 선실 밖으로 나온다. 이제 막 돛을 올려 항해를 시작했을 뿐인데 어느덧 168페이지가 훌쩍 넘어갔다.  장편소설의 긴 호흡의 맛이 이런 것일까? 여기까지는 숨도 못 쉬게 흥미진진하게 때문에 단숨에 읽을 수 있다.
  한동안 지루한 항해가 이어지다가 (이 부분은 실제로 읽기에도 지루하다. 그러나 걸작은 결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결점을 개의치 않을 만큼 대단한 감동을 주기 때문에 걸작인 것이다) 드디어 배의 속도가 빨라진다.
  권태로운 수평선 너머로 고래의 물줄기가 나타난 것이다! 선원들은 보트를 내려 향유고래를 뒤쫓기 시작한다. 작살이 날아가고, 그에 달린 밧줄이 풀려나가고 물살을 가르는 추격전이 펼쳐지는 바다는 온통 고래의 피로 물들어 진홍색으로 변한다. 물보라 때문에 시야가 흐려진 가운데 명령 소리만 들려온다. 덩치 큰 노잡이들이 보트를 짐승에게 붙이면 작살잡이가 뱃머리에서 몸을 내밀고 창을 던져 치명상을 박아 넣는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는 한동안 더 이어진다. 그만큼 고래는 강하고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리는 인간의 것이고,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생물이 최후를 맞이한다…….
  향유고래에 이어 범고래까지 사냥에 성공한 피쿼드 호는 배의 좌우에 고래 머리를 하나씩 달고 앞으로 나아간다. 상상해보라. 뼈만 남은 고래의 머리를 좌우에 달고 있는 배의 모습을!
  사냥 장면이 어찌나 생생한지 읽다보면 피쿼드 호에 올라탄 느낌이 든다. 이슈메일의 말투에 중독되다 보면 내 자신이 30대 후반의 서울 출생 소설가가 아니라, 진짜 남자들의 세계를 동경하며 배 멀미에 왝왝 대면서도 짐짓 럼주는 입에 가져가는, 이제 막 팔다리가 길어지기 시작한 소년이라도 된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다. 바다의 지루함을 눅이기 위해 갑판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소년. 『모비 딕』을 읽는 것은 이런 소년이 되어보는 일이다. 책이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마물인 까닭은 바로 이런 순간 때문이다.
  모비 딕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백인 문명, 대타자, 그 외 별별 해석이 등장한다. 온갖 은유가 통과하는 광활한 정류장인 셈인데 우리는 가장 큰 괄호 속에 흰 고래를 넣어보자. 그러니까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적. 너무나 크고, 무섭고, 아름답고, 증오스러우면서도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적이라고 상정하는 것이다. 깊어진 증오가 우정처럼 변할 수도 있는 상대 말이다.
  적이 커지면 커질수록 반드시 싸워 이기겠다는 인간의 의지 또한 커진다. 이 때문에 인간은 점점 더 확장되어 본래의 자신을 넘어서게 된다. 에이해브 선장은 그렇다. 파멸될 줄 알면서도 기어이 나아가는 초극적 인간, 광기와 이성이 한 몸이 된 인간의 모습을 그가 보여준다. 냉철한 스타벅도, 낙천적인 스터브도, 피쿼드 호의 모든 사나이들도 그 뒤를 따르게 된다. 바다와 모험과 에이해브가 그들을 위대함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제 신비한 바다에서 고래를 쫓던 시대는 지나갔다. 사라진 것은 포경선뿐이 아니다. 우리는 현대라는 최신 의자에 앉아있는 탓에 거대한 모험을 상실했다. 게임 같은 가상세계가 아니고서는 이런 류의 모험은 불가능하며 인간의 존재감 또한 자디잘게 축소되었다. 답답한 일상에 질려버린 어느 날, 모비 딕을 펼쳐보라.
  이 글을 읽는 이 중에 『어린이 백경』만 읽었거나 아직 『모비 딕』을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정말 부럽다. 『모비 딕』을 절반쯤 읽다가 고래학 사설에 질려 책을 덮어버린 사람 또한 부럽다. 인간이 책이라는 사물을 손에 쥐고 맛볼 수 있는 극도의 쾌락을 아직 남겨두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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