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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너머에서
박해천, 『아파트 게임』, 휴머니스트, 2013
[180호] 2013년 10월 07일 (월) 이강진 문학평론가
   
  현실세계에서 패퇴한 좌파 이론가들이 문화의 상부구조에 의탁하여 스스로의 ‘가능성’을 변호해왔다는 이글턴의 지적은 뼈아프지만 탁월했다. 굳이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유행했던 텅 빈 해체를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일련의 수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도처에서 스스로의 무용함을 변호하느라 애를 쓰는 중이다. 물론 그들이 내세운 전제대로 자본의 일차원적 합리성이 인간성을 상실한 기계화로 치닫는 중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무용한 것들이 곧 자율성의 상징으로 예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 모순된 수사들, 무용함으로부터 가능성을 이끌어내겠다는 전회가 이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적대의 대상으로 삼아온 자본의 힘에 전적으로 의지해온 결과나 다를 바 없었다. 만약 지난 몇 세기 동안 계속된 고도성장과 그에 따른 잉여 구매력의 확보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면,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문화적 해방의 외침들은 도저히 스스로의 가능성을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해천의 『아파트 게임』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언뜻 이 책은 한국의 부동산 현상을 관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보이지만, 저자에게 있어 보다 중요한 것은 아파트라는 ‘한국적인’ 매개항이 어떻게 한국의 중산층 형성과 그 지속에 영향을 미쳐왔는가를 추적하는 일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회에서 아파트는 그것이 처음 지어질 때부터 이미 단순한 주거의 공간 또는 투기의 대상이라는 상투적인 의미를 완전히 넘어선 존재였다. 아파트는 중산층의 정신사적 맥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알고리즘이자 그들의 내면의 윤곽을 주조하는 거푸집이며, 이른바 ‘80년대 문화’와 그 이후 사이에 나타난 거대한 결절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부모의 손에 이끌려 아파트로 들어갔던 강남 2세대”는 90년대의 신세대 또는 영상 세대의 첨병을 이루었으며, 이들은 새로운 문화를 부러워하며 “댄디인 척 흉내 내려고 연기”하는 이전 시대의 주체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신종’이 되어 이후의 문화를 완전히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로부터 저자가 이끌어내는 결론은 (너무나 당연한 동시에)가히 충격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된 양식들은, 그것이 휘두르는 폭력적인 구조의 횡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라는 거푸집에 의해 내면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이미 구축되고 있었던 것이다.
  강남의 개발 이후 어언 40여년, 한 세대를 형성하는 시간을 보통 30년으로 본다면 이미 한 세대 이상이 아파트에 의해 형성되는 특정한 맥락 위를 거쳐 온 셈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한국사회에서 자본의 물화가 이미 완성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비판자의 자리를 자처하는 문화와 이론은 지금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 아직도 이전 시대의 방법론들을 동원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신조처럼 삼고 있지 않은가! 이제껏 문화이론이 자신의 내부에서 일구어낸 일련의 승리들은, 그것이 물화의 위협에 노출된 생활세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무용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만 저 낡은 접속사를 벗어던져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일전에 모 평론가는 저자를 가리켜 ‘속물근성에 빠진 개량주의자’라고 혹독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박해천이 보여주고 있는 이 ‘속물적인’ 시도야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헛된 권위의 너머에서 우리가 무엇을 사유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변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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