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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LASSIC -지식과 일상의 윤리
왕양명의 『전습록』
[138호] 2006년 12월 04일 (월) 문성환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카프카는 한 편지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다가오는 책이라고 썼다.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확실히, 훌륭한 한 권의 책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괴롭힌다. 그것은 먼 데로부터 마치 우연처럼 다가와서 사정없이 나를 찌르고, 흔들고,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은 나로부터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온갖 이유들을 빼앗고 무장해제 시킴으로써 나를 나 아닌 것이 되도록 만든다. 지각불가능하게 되기. 그런 점에서 보자면 고전(古典)은, 옛 어른들의 고리타분한 과거의 말씀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이곳’의 나로부터 시작되는 ‘미래의 책’이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양명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며칠 전 어린 자식이 병에 걸려 위급하다는 편지를 받은 이후로 제 마음이 그로 인한 번민 때문에 감당이 되질 않습니다.’ 아마도 제자는 잠시 ‘휴학(?)’을 허락받고 집에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명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이야말로 열심히 공부해야 할 때라는 것, 이런 때를 놓친다면 한가할 때의 강학(講學) 활동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는 것,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 지극한 정이지만 근심하고 괴로워함에 치우쳐 이미 사사롭게 지나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양명은 이렇게 말했다.

다소 과장된 객기(客氣)처럼 보이는 이 에피소드에는 최소한 우리들이 오늘날 사용하는 ‘공부’라는 말의 의미를 낯설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이 대답이 사사로운 가정사(家庭事)보다 중요한 공부, 라는 식의 단순한 의미는 물론 아닐 것이다. 아이가 아프면 집에 가봐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따지는 것도 또한 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그렇다면 양명에게 공부는 무엇이었을까. 양명에게 있어 공부란, 적어도 번민으로 인해 괴롭고 화급한 순간에조차 놓치지 말아야 할 무엇인가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리하여 공부란 번민 없이 즐기는 무엇이 아니라 번민을 뚫고 나가는 그 무엇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언제나 나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넘어서는 문제와 직접 맞닿아 있다는 것.

양명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명나라의 서북 깡촌 지역이었던 ‘용장(龍場)’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龍場大悟]. 당시 양명은 중앙의 핵심 권력자중 하나였던 환관 유근을 탄핵했다가 흠씬 두들겨맞는 형벌을 받고 장렬하게 좌천된 상태였다. 통념적인 판단으로는 일생 중 가장 초라하고 비극적이며 또한 위태로웠을 한 시기이지만, 양명은 용장에서의 그 몇 해를 자기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용장 시절의 양명은, 이후 동아시아 사상사의 배치를 뒤흔들게 되는 ‘양명학(陽明學)’을 출발시켰다는 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일생 중 가장 빛나는 한 시기였다고 기억될 만하다. 이후 양명의 생애는 끝내 지식과 일상을 하나로 묶는 윤리적 태도로 일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知行合一].

공부는 왜 하는 것일까. 공부를 하는 것과 일을 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양명 시대에도 이미 공부와 일, 지식과 일상이 괴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관리가 되기 위한 공부와 자기 수양에 이르는 공부가 따로 있다는 생각. 하지만 양명에 따르면, 아니 유학자의 경우 공부의 목표는 언제나 분명하고 단호하다. 이른바 성인(聖人) 되기.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 구도는 확고하다. 유학의 전통 안에서는 일반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 이야기하는 성인이란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요컨대 성인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니 그렇게 끊임없이 배우고 묻는 사람일 때라야 성인은 비로소 성인이 될 수 있다.

때문에 공부는 처음부터 지식의 획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요컨대 깨달음은 대상의 실체나 속성을 학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범박한 차원에서 말하자면, 깨달음이란 단지 각각의 수준에서 내가 무엇을 아는가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는 만큼 행동할 뿐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가 곧 우리의 앎이기 때문에.
지행합일은, 알게 되면 그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말이 전혀 아니다. 지행합일은 ‘지와 행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행’일 따름이다. 앎이 행위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들의 행위는 곧 우리들의 앎 자체라는 것. 그러므로 나의 모든 행위는 언제나 나의 앎을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

양명에 따르면,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행하지 않는 것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밖에서 따로 앎을 구할 필요가 없게 된다. 나의 앎은 나의 행위로, 나의 행위는 나의 앎을 통해 드러난다. 왜냐하면 앎[知]이란 곧 내 안의 양지(良知)이므로, 안다는 것은 결국 내 안의 양지가 밝게 드러나는 것이므로.[致良知].

양명은 크고 심원한 문제들조차 언제나 구체적이고 잗다란 현실 속에서 고민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태산같이 우뚝한 존재로서의 성인이 아닌 평평한 평지 위의 존재로서의 성인의 이미지를 자신의 후학들에게 선물했다. 좬전습록좭은 그렇듯 구체적 일상에서 양명과 그 제자들이 서로에 대한 신뢰와 넘치는 애정으로 부딪힌 우정의 기록을 담고 있다. 거기에는 가르침은 있으나 배우는 자가 따로 없고(누구나 배운다는 의미에서), 물음은 넘치지만 가르치는 스승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스승은 반드시 제자들의 물음을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고전’(특히 동양고전)을 읽으면 추상적이고 모호하고 관념적이어서 실제적인 도움이 안 된다고 불평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남김없이 드러내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숨겨진 게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혹시 우리들이 물음을 아직 다하지 못한 때문은 아닐까.

어느 날 한 제자가 공자를 찾아와 이렇게 하소연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러기엔 힘이 부족합니다.” 그러자 공자가 대답했다. “힘이 부족한 사람은 중도에 그만 두는 법. 그런데 너는 해보지도 않고 스스로 한계를 긋는구나!” 사람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단 해보지도, 해보려고도 않고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만은 성인도 어찌해 줄 도리가 없다.

문성환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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