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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산책] 유년모티프의 역사성과 현재성
“잃어버린 시간”을 품고 있는 어른들을 위한 세계
[179호] 2013년 09월 16일 (월) 우혜언 음악학 박사
   

  “아이로 존재한다는 것은 … 재미있게 체험하고 이러한 체험을 통해 세계, 자연, 기술, 예술 그리고 만물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렇게 발전하며 자기의 힘을 점점 더 펼쳐나간다는 것을 말한다.”
- 락헨만(H. Lachenman)의 『파악과 의미파악에 관하여 - 어린이를 위한 시도』 중에서

  “진실로 소리 나는 것에, 순수한 소리 남에 즐거워하는 것은 죄 없는, 감동적인 즐거움이다! 어린애 같은 기쁨이다! 다른 사람들이 쉴 새 없는 일로 자신을 마취시키고, 수많은 밤새들 그리고 흉측한 벌레와 같은 생각에 휩싸여 결국에는 까무러치며 땅에 떨어질 때에, 오! 나는 내 머리를 시원하게 하는 거룩한 음들의 샘에 잠기게 하면 회복의 여신은 나에게 소년의 흠 없음으로 채운다.”
- 박켄로더(W. H. Wackenroder)의 『예술 애호가를 위한 예술에 대한 판타지』 중에서

  누구에게나 지나가 버린, 그래서 다시는 온전하게 되찾을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은 있기 마련이다. 이 시절에 대한 동경은 우리를 끊임없이 내면의 깊숙한 곳으로 이끈다. 유년(Childhood)에 대한 관심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그 미학적 가치를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유년’은 각 시대마다 그 해석을 달리하면서 오늘날까지 예술작품의 중심 모티프로 등장하고 있다.
  유년모티프에 대한 관심은 곧 어린이의 존재와 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렇듯 문학, 음악, 미술 등 창작활동 전반에 걸쳐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는 ‘유년’은 각 시대의 의식적 패러다임을 반영하는 거울이자 작가들의 애착어린 소재임을 실감하게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린이 세계의 어떤 특징이, 어떤 매력이 창작자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인가? 예술작품에 나타나는 ‘유년’에 대한 미적 평가는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어떻게 달라졌는가?
  18세기 근대사회가 시작되면서 특히 루소(J. J. Rousseau)의 기여로 - 어린이는 어른과 구별된 독립된, 독자적인 존재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19세기에는 낭만주의 형이상학 미학의 힘을 얻어 ‘유년의 신화화’가 두드러졌다. 낭만주의 시대에 유년은 도달할 수 없는 세계, ‘영원한 청춘’의 세계로 평가 받으면서 유년시기에 대한 동경은 곧 시적 세계, 무한의 세계, 꿈의 세계, 유토피아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동일시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프루스트(M. Proust)와 벤야민(W. Benjamin)의 작품이 몰고 온 여파가 대단했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Á la recherche du temps perdu, 1913-1927)에서, 벤야민은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Berliner Kindheit um Neunzehnhundert, 1932-1938)에서 각각 유년의 회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문화적, 역사적 인식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들을 제시하고 있다.
  또 다른 흐름은 프로이트(S. Freud)와 융(C. G. Jung)이 몰고 왔다. 이 두 사람의 유년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는 무엇보다 무의식의 내면세계를 학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된다. 그 이전 시대와 달리 20세기 후반을 넘어가면서 유년은 더 이상 교육적, 미학적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존재이자 사회적 연구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작품 속에 등장하는 어린이 혹은 청소년의 상들이 ‘거울’ 역할을 함으로써, 즉 사회의 반영체로 기능함으로써, 시대의 문맥과 연결되고 있다.
  유년에 대한 관심은 특히 음악 영역에서 널리 울려 퍼졌다. 음악작품에 등장한 ‘유년’ 모티프는 음악 고유의 특성인 ‘울림’과 ‘시간성’으로 그 매력을 더한다. 한 예로, 슈만(R. Schumann)의 작품 ≪어린이 정경≫(Kinderszenen)에 나타난 ‘유년’ 모티프는 이 작품에 녹아난 낭만주의의 미학과 슈만의 무의식 및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는 유년을 통해 되살아나고 있다. 특히 슈만과 그의 연인 클라라의 유년은 ≪어린이 정경≫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뒤엉켜 있으며, 이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유년에 대한 동경은 단순히 유년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두 연인에 대한 서로의 동경과 그리움, 그리고 그들의 미래로까지 승화되어 나간다. 슈만의 ≪어린이 정경≫은 유년모티프에 내재하는 시간성을 음악의 시간성 안에 가장 이상적으로 스며들게 한 대표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유년의 음악적 표출이 단순히 아름다운 울림으로만 묘사되지는 않는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출신으로 아방가르드 예술음악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헬무트 락헨만(H. Lachenmann)이라는 작곡가가 있다. 락헨만의 사회비판적 의식은 기존의 음악적 관습과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운 맥락과 시선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역설한다. 특히 청취습관과 음향에 대해 서술한 그의 음악관은 극단적인 음역대와 음향으로 그려지는 그의 작품≪어린이 유희≫(Das Kinderspiel)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하기에 그의 작품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단순히 우리들의 귀에 ‘아름답지’만은 않다. 하지만 선입견 없는 어린이에게 그 음향은 흥미롭고 ‘좋은’ 소리로 인식될 수 있다. 어린이는 음악적 인습과 습관에 얽매이지 않고, 사회적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음악을 청취할 수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음악을 비롯하여 많은 예술 작품에서 꾸준히 유년모티프가 등장하고 있다. 이 모티프의 지속성은 단순히 교육적인 측면을 떠나 미학적인 관점에서, 시대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유년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점은 유년모티프가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오히려 어른의, 어른을 위한 유년, 다시 말해 어른들의 세계에서 논해지는 주제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년이 소재가 되고 있는 작품들이 어린이가 아닌 어른, 유년을 품고 있는 어른을 위해 탄생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지속적으로 창작자들의 애정 어린 소재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유년모티프 자체에 특유한 방식으로 역사성과 현재성이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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